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너 피크민 알아…?”
당연히 알지.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는 모바일로 나온 <피크민 블룸>에 한창 빠져있다고 했다. 나도 그 게임은 알고 있었지만 대충 포켓몬 GO의 일시적인 유행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게임을 하지도 않던 친구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포켓몬처럼 캐릭터가 유명한 것도 아니고, 막강한 미디어믹스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닌데 한국에서 새삼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흥미로웠다.
그래서 게임을 다운로드받아 실행해 보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피크민과 함께 하는 마이 라이프.

겜덕이 보는 피크민 블룸
<피크민 블룸>의 게임성은, 미안하지만 ‘게임성’이라고 말할 것도 거의 없다. 이건 게임이라기보단 보조 기능이 있는 만보기에 가깝다.
<피크민 블룸>의 주요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 스마트폰을 갖고 걸으면 걸음 수가 카운트된다.
- 피크민 화분을 심은 후, 특정 걸음수만큼 걸으면 피크민을 뽑을 수 있다.
- 다양한 방법으로 피크민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
- 호감도가 4에 이르면 피크민이 데코를 가져온다.
- 걸으면서 꽃을 심으면 코인이나 화분, 과일 등을 얻을 수 있다.
- 주변의 랜드마크에 있는 꽃봉오리에 꽃을 피우면 대량의 정수를 얻는다.
- 여기저기 생겨나는 버섯에 피크민을 보내면, 다른 유저들과 협동해 버섯을 제거하고 각종 보상을 받아온다.
- 하루가 끝날 때마다 몇 걸음을 걸었는지, 그날 찍은 사진과 감정 스탬프를 가지고 간단한 일기인 ‘라이프로그’를 작성할 수 있다.
즉, 1) 걸음 수를 카운트하고 거기에 따라 보상을 받는 기본 건강 앱 구조에, 2) 다양한 종류의 데코를 모으는 수집 시스템, 3) 버섯/이벤트/커뮤니티 데이 등의 시간 제한적 이벤트.
각 요소들은 전혀 새롭지 않고, 아이템 간의 유기적인 연결도 부족한 느낌. 이벤트도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솔직히 말해 게임으로서 보자면 전반적으로 엉성하다는 인상. 뭐, 나이언틱이 그렇지…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오히려 이전에는 게임에 별 관심이 없던 층에 먹힌 것 같다. 게임의 적당히 엉성한 구조는 유저들로 하여금 콘텐츠에 과몰입하지 않으면서 일상적 습관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복잡하고 묵직한 게임은 마음먹고 해야 하는데, 이건 그냥 켜고 걷기만 하면 되니까. 게임에 대한 지식이나 센스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런 게 없으면 없을수록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인들을 저격한 요소가 몇가지 더 살펴보자.
포인트 1) 슬기로운 갓생 생활
한국인은 대체 뭘까. 성질 급하고, 경쟁 의식이 강하고, 무리짓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 최적의 효율을 따지는 사람들. 이 땅에서 멀티 플레이 경쟁 게임이 압도적으로 메이저인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얼핏 보면 <피크민 블룸>은 전혀 메이저가 될 만한 게임이 아니다. 경쟁 요소도 없고, 레벨업 보상도 보잘것 없으며, 레벨링이나 공략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 친구 기능은 있는데 친구랑 채팅조차 할 수 없다. 가끔 엽서를 보내며 안부를 확인하는 게 다다.
그런데 이게 ‘게임’이 아니라 매일매일 밖에 나가 산책하는 습관을 도와주는 ‘건강 보조 앱’이라면?.

매일매일 얼마나 걸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른 소소한 보상(피크민과 아이템)을 받을 수 있는 <피크민 블룸>은 ‘미라클 모닝’처럼 생산성을 중시하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며 성취감을 얻는 ‘갓생’ 트렌드에 부합한다.
다른 생산성이나 헬스앱보다 훨씬 강화된 게임적 요소(당연함 게임임;)가 걷기 습관을 들이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라이프로그를 일기처럼 쓸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하루에 버섯을 제거할 수 있는 횟수 제한(3회)이나 커다란 꽃을 새로 피울 수 있는 시간 간격(24시간), 파견한 피크민이 복귀하는 데 걸리는 기본적인 시간 등이 게임을 하루종일 붙잡고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게임, 별로 할 게 없다.
추가 횟수를 살수는 있지만 과금 효율이 끔찍하다. 아무리 머리가 깨졌더라도 상점의 가격표를 보면 구매 욕구가 다시 들어갈 거다.
최소한의 관여도만으로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피크민 블룸>의 유익함을 높인다. 갓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해하기도 하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경쟁과 폭력을 제거했다. 이 게임에서 폭력적인 구석이라곤 버섯을 때리는 것 뿐이다. 성장시키지 않은 화분이나 중복 피크민을 처분하는 것도 ‘화분 돌려놓기’ ‘피크민 야생에 풀어주기’라고 표시된다. 사실 원작 피크민 시리즈는 이렇게 해맑진 않은데, <피크민 블룸>의 세계는 온통, 그저 꽃밭이다.
유익하고 무해함. <피크민 블룸>은 게임이 가지기 어려운 두 개의 미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포인트 2) 현실과 가상의 결합제
<피크민 블룸>이 작동하는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수집욕. ‘새롭고 희귀한 피크민(혹은 엽서)을 모으고 싶다’는 욕망이 <피크민 블룸>을 계속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수집욕이 발휘되는 것은 현실의 장소다.

데코는 현실의 특정 장소에 소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비행기 피크민은 실제로 내가 공항 근처에 있을 때에만 나온다.게임 내의 조건과는 별 상관이 없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공항에서 앱을 켜야 한다.
엽서 역시 특정 장소에서 수집할 수 있다. 거대한 꽃에서 일정 수량의 꽃잎을 소모하거나 버섯을 제거하면 그 장소의 실제 사진이 찍힌 엽서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은 별 쓸모없는 동네 풍경이지만 가끔 특이하거나 특별한 장소가 찍힌 엽서도 있다. 버섯 제거에는 친구를 초대할 수도 있고, 친구끼리 직접 엽서를 주고받을 수도 있어서 엽서를 수집하는 방법은 데코보다 더 광범위하다.
이러한 방식들로 현실과 가상의 개념이 연계된다. 현실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를 갖다붙이는 정도가 끝이었던 초기 AR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현실의 보상을 가상으로 받고, 가상의 경험을 현실에 투영한다. 쉽게 말하면 <피크민 블룸>을 켜면 좀 걷고 싶어지고, 어딘가에 가면 <피크민 블룸>을 켜게 되는 것이다.
포인트 3)인싸들의 트렌드
닌텐도의 게임은 ‘가족 지향적’이라는 원칙이 있다. 아이들이 해도 전혀 해로울 게 없고, 화목한 가정과 유쾌한 모임에도 어색하지 않은 게임. (물론 서드 파티로 넘어가면 얘기가 좀 달라지고, 가끔 닌텐도도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긴 하지만)
하지만 엄마아빠와 단란하게 TV 앞에서 게임을 즐기는 건 상상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닌텐도는 주로 가족보다는 또래나 같은 집단 내에서의 유행과 공감의 소재로서 기능한다. 닌텐도 특유의 ‘인싸스러움’으로 <동물의 숲>이나 <피크민 블룸>은 ‘귀엽고 힙한 트렌드’가 될 수 있었다.

<피크민 블룸>이 처음 인기를 얻게 된 것도 런칭 이벤트가 아니라 SNS 등지의 입소문을 통해서였다. 사실상의 역주행.
아이돌이나 인플루언서들의 추천도 추진력을 더해주긴 했지만, 주요한 것은 게임의 캡쳐 화면이나 밈이 꾸준히 소셜미디어를 떠돌았다는 점이다. 어벙하게 생긴 피크민들은 짤로 쓰기도 좋다. 특히 <피크민 블룸>은 원작의 기괴한 디자인 센스는 사라고 거의 귀여움만 남았다. 남에게 추천해도 부담스럽지가 않다.
특별한 데코 피크민과 엽서 인증샷과 정보 공유는 자연스럽게 화제로 기능한다. “드디어 ㅇㅇ피크민 얻음” “어디서 얻으셨어요?” 같은 대화를 통해 약간의 자랑과 정보 공유로 커뮤니티는 더욱 돈독해지고 놀이는 확장된다.
<피크민 블룸>은 처음부터 한국 시장을 노리고 만든 건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한국에서 피어나기 딱 좋은 조건들을 갖춘 셈이다.

한국에서 유독 보라피크민이 인기있는 것 같아요 김치피크민도 보라피크민 단독으로 나왔고 ㅎㅎ
저도 보라피크민이 최애..!ㅎㅎ 덩치도 큰데 약간 맹하면서 매력적인 포인트가 있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