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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이머의 추억
저는 아직도 2007년의 겨울을 기억합니다. 그때 PS3는 정말 할 게임 없었거든요. 한국어로 정식 발매된 게임은 더욱 드물었고. 게임샵에 가서 새로 나온 게 있나 기웃거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러다 어느날 집어온 게임이 <어쌔신 크리드>와 <언차티드: 엘도라도의 보물>.
그리고 그 다음 15년 동안, 이 두 게임과는 한 번도 빠짐없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사서 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뭐, 15년 동안 해왔다고 해도 어크와 달리 언챠는 4편+번외편 하나라 총 5개뿐이지만.)
어쨌든 <언차티드> 시리즈는 단 한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언제나 큰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언차는 게임이라는 오락 장르가 추구하는 퓨어한 재미의 결정체예요.
가장 좋아하는,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게임은 다른 것일 수 있지만 저에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언차티드 시리즈입니다.
그런 게임이 영화화된다니….. 제정신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언차티드> 줄거리
어렸을 적 양친을 잃고 형인 샘과 함께 보육원에서 자란 네이트 드레이크. 지금은 바텐더 겸 소매치기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보물과 탐험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빅터 설리반’이라는 남자가 함께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마젤란이 숨긴 황금을 찾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네이트는 설리, 새로 알게 된 동료 클로이와 함께 마젤란의 보물을 찾으러 나선다. 그러나 스페인의 재력가인 몬카다가 손을 뻗쳐오고 설리와 클로이에게서 각각 서로를 믿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게이머가 바라는 영화
먼저 현실부터 직시하죠. 게임 원작 영화는 보통 망합니다.
비주얼부터 눈뜨고 못 봐줄 상태인 것들도 수두룩하고 잘쳐줘도 기스난 B-급, 흥행도 망해서 언급하기 쪽팔린 것들이 넘쳐납니다. 게이머들이 “야 그래도 이거 원작 게임은 진짜 쩔거든ㅠㅠㅠ”이라고 항변해봤자 우린 이미 패배자거든요.
망하는 이유도 아주 가지가지입니다.
… 자, 여기서 잠깐. 게임 원작 영화는 무엇을 목적으로 해야 할까?
- 게임의 화면과 액션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 캐릭터의 외모나 복장의 싱크로율? → 역전재판
- 복잡하고 장대한 세계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본편과의 연결점을 만들어두는 것? → 어쌔신 크리드, 워크래프트
- 그냥 게임의 기본 설정만 빌려와도 좋으니 그냥 대중적으로 빵 터지기만 하면 될까? → 레지던트 이블
….. 정말 쉽지 않습니다.
게임 원작 영화는 게임과 영화 사이에서 둘 다 잘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특히 게이머 쪽에서 욕심이 많죠. 우리만 만족하고 싶으면 게임을 하겠지, 왜 굳이 영화를 보겠어?
그러니 필요한 것은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비주얼, 납득 가능한 설정. 원작 팬에게 그 게임을 했을 때와 비슷한 감상을 안겨줄 수 있어야 하되 우리끼리만 알거나 공감할 수 있으면 안 되고,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영화적인 문법에 맞을 것.
다행히 타산지석으로 삼을 영화들이 수백개가 있는 덕분인지 <언차티드>는 균형 잡힌 각색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게임 프로듀서가 영화 제작에 깊게 관여한 덕분이기도 하고.

<언차티드> 영화판 스토리는 게임 4편을 베이스로 모든 시리즈를 조금씩 다 섞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물의 위치나 빌런의 존재는 물론 네이트가 설리와 처음 만난 계기나 샘에 대한 설정도 원작과는 조금 달라졌죠.
하지만 설정이 조금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이 캐릭터의 성격이나 관계, 혹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뒤틀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골수팬에게 이런 설정 변경이 크게 모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아요.
게임 내용을 전혀 모르거나 신경쓰지 않는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조정을 거친 부분도 눈에 띕니다. 설리와 네이트를 잇기 위해서 샘을 가운데 넣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네이트가 바에서 바텐더로 일한다는 설정도 원작 게임에서는 없고 영화에서만 나오는데, 이는 네이트의 언변과 손재주를 부각하는 장치고 제법 잘 어울리기도 해서 캐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는 설정을 바꾼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듯 골수팬들에게 따로 계속 팬서비스를 챙겨줍니다. 3편의 비행기 추락신을 카메라 연출까지 거의 똑같이 재현한 것은 물론 가장 큰 즐거움.
그 외에도 저 장면은 3편의 오마쥬고, 네이트의 가방 안쪽에 너티독 스티커가 붙어있네, 앗… 이 브금은 4편 테마의 어레인지! 마지막 쿠키 장면에서 입고 있었던 티셔츠는 3편에서 네이트가 설리를 처음 만났을 때 입은 거야! 라는 오타쿠스러운 포인트가 여기저기 넘쳐나요.
이런 장면마다 원작에 대해 읊어대는 투머치토커가 되고 싶어서 정말 미치는 줄… 특히 놀런 노스가 카메오로 등장했을 때에는 거의 벌떡 일어나서 날뛰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모든 것은 디테일에
이 영화는 (플빠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인트로부터 알 수 있듯) 플레이스테이션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영화로서도 충분히 기능합니다.
타임 킬링용 오락 영화의 기준이 객관적으로 좀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인디아나 존스 후배의 보물찾기 모험은 꽤 재미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지. 정말 이걸로 될까?

이 업계에 처음 뛰어든 꼬마가 보물 전설을 줄줄 꿰는 것에 비해 ‘전문가’들은 무능하고 빌런들은 너무나 바보같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형의 존재 등 영화의 각본은 얄팍하다 못해 한번 이성의 숨결을 불면 다 꺼져버릴 듯합니다.
게다가 묘사가 얄팍해서 네이트와 설리와의 관계가 널을 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죠.
게임 역시 개연성에 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과 영화라는 플랫폼의 차이는 꽤 큽니다.
게임에서는 딱히 별도의 묘사가 없더라도 내가 이 캐릭터를 플레이해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입되고 정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런 게 없기 때문에 캐릭터의 감정과 생각, 심리 묘사에 좀 더 공을 들여야 하죠.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마치 게임처럼 처리해 버려서 다소 비약적인 인상을 줍니다.
게임 <언차티드> 시리즈의 무기는 바로 디테일이었습니다. CG로 만들어진 인간의 움직임과 배경이 미쳐버린 디테일을 통해 현실적인 무게감을 가지고 몰입을 유도하죠. 이런 디테일 때문에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느끼는 네이트와의 거리는 매우 가깝고, 네이트가 달리고 붙잡고 떨어지고 총 맞는 경험은 100% ‘내’ 것이 됩니다. 으ㅇ허어어억 어떡해 으악!!

그런데 오히려 실사 영화화되면서 그 무게감이 없어져요. 배우는 실제 사람이고 관객은 그를 명백한 타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죠. 내가 조종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니까.
그래서 이번엔 네이트가 퍼즐을 풀고 날아다니는 걸 ‘나’는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네이트 또 고생한다’, ‘톰 홀랜드 귀엽네’ 같은 생각만 들뿐.

게임을 그대로 가져와도 게임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대로가 아닙니다. 모니터에서 보이는 사진의 색감을 그대로 인쇄물에 살리려면 별도의 조정이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게임이 영화화될 때 그 감성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선 묘사와 연출이 달라져야 해요.
게임계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하는 <언차티드>를 영화화하면서 놓친 것이 바로 (영화적인) ‘디테일’이라는 점은 좀 아이러니합니다.
여담으로 비행기 추락신 말인데, 영화도 나쁘진 않았지만 정말 게임할 때의 그 대책없음과 긴박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준 건 <언차티드> 영화판이 아니라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이거 나만 불편해?
그래도 다 좋아요. 정말 다 괜찮았어. 엘레나가 등장하지 않은 것도, 빈약한 개연성도, 마크 윌버그의 설리는 사실 설리+샘 반반무마니였던 것도, 나딘을 베이스로 만들었지만 비교할 수 없는 일회성 악역인 조도, 어이없는 악당의 최후도, 급진전하는 감정선도… 다 괜찮다 이거야.
근데 이것만은!!! 이것만은 싫었어.

월드 스타가 되어버린 톰 홀랜드를 기용했으니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카메라는 계속 은근하게 몸매를 훑거나 노출합니다. 하지만 유난히 담백한 게임으로 손꼽히는 언챠에서, 그것도 네이트를 성적 대상화로 써먹다니 좀 당황스럽습니다.
좀 대책은 없지만 웃긴 성격의 친한 이웃집 오빠가 페로몬 뿌리는 것을 목격한 듯한 굉장히 언짢은 기분….
아니, 톰 홀랜드 특유의 동안 때문에 오빠도 아님….
이런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제가. 그리고 네이트가 운동을 하는 장면은 보물 도둑질에 필요한 체력 어필 및 그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걸 압니다. 저 정도 근육이 없으면 잃어버린 유적에 있는 10m짜리 조각상에 기어 올라갈 수가 없잖아! 알아! 나도 아는데!
이 시선이 묘하게 불쾌하게 여겨진 게 성적 대상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인지 나랑 친한 네이트라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톰 홀랜드가 “영화를 찍을 때 자신이 너무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 않았나”란 인터뷰를 해서 다소 논란이 되었는데, 보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갔습니다.
영화 내내 인물의 내면 묘사는 부족한데 자꾸만 네이트의 비주얼이나 근육을 보여주려고 해요. 이건 배우만을 탓하기보다는 총체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하여간 이것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종합평: 그래도 시작이 미약하진 않았다

좋은 작품이라고 해서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진짜 좋은 작품은 단점을 신경쓰지 않게 만드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거죠.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자면 “성공한 게임 원작 영화는 한 가지 이유로 성공하고 망한 게임 원작 영화들은 다들 제각기 다른 이유로 망한다.”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성공에 필요한 단 한 가지 이유란… 물론 ‘재미’입니다.
영화 <언차티드>는 플롯의 평면성, 캐릭터 해석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등등의 많은 단점이 있었지만 꽤 재미있는 영화였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그 점만으로도 겜덕으로서 감동스럽습니다.
<언차티드>가 흥행 수익이 전 세계 3억 7천만 달러를 돌파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는 않은 흥행을 기록한 성공적인 게임 원작 영화라는 점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집니다. 자랑할 수 있어요. 이 재미있는 영화의 원작이 게임이었다고.
….. 아, 그럼 게임하고 비교하면 어떻냐고요.
당연히 게임이 더 재밌지.
<언차티드>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번 시작, 평균 정도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