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me, CULTURE, Film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 리뷰 :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고 외칠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 포스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 일러스트

30대에게 ‘슬램덩크’란

특정 세대마다 언제 어디서든 이름을 꺼내면 순식간에 그 시절 그 추억이 소환되는 문화적 아이콘이 있기 마련인데, 8,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슬램덩크>가 바로 그렇다.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에게 <슬램덩크>는, 그냥 ‘재밌는 만화’라기보다도 나무판을 덧댄 철제 책걸상과 분필 먼지 날리는 칠판, 식판이 짤그락대는 소리나 문방구에서 팔던 불량식품, 흙먼지 날리던 놀이터, 한 권당 100원씩 하던 만화책 대여점을 줄줄이 떠올리게 하는 그런 주문이다.

그 시절 감성, 이라기보단 그냥 그 시절 그 자체.

…. 하지만 나이가 좀 들면 옛날에 좋아했던 것을 다시 꺼내는 게 조금 두려워진다. 

꺼내서 오늘의 햇빛에 비춰보면 “와 이게 이랬었다고?” “다 추억보정이지 지금 보니 완전 구리네”도 있어서, 그게 슬프고 무섭다.

좋아했던 것이 시대에 맞춰서 리메이크로 부활한다고 해도 수준 이하의 퀄리티나 변해버린 시대와의 괴리감이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까지 망쳐버리곤 한다. 이제는 <세일러문>을 떠올려도 훌륭한 작품이고 소중하다는 생각보단 그냥 쓴웃음만 나오는 것처럼.

그래서 <슬램덩크>가 30년 만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는 이야기에 마냥 좋아하지만은 못했다. 차라리 그냥 기억 속에서 영원하기를 바랐었는지도.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제 30대가 된 어른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네가 좋아했던 건 정말로 쩔어주는 만화였고, 30년이 지나 이렇게 멋지게 돌아왔다고.

북산고 농구부 선수들인 송태섭 정대만 강백호 채치수 서태웅

30년 전의 만화를 새롭게 만드는 방법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 원작을 둔 애니 극장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총집편도 후속작도 아니다. 극장판은 원작에 나온 경기들 중 마지막인 ‘산왕전’을 다룬다.

그러니까 평범한 변방의 농구부였던 북산고에 재능 있는 1학년인 강백호와 서태웅이 들어오고, 그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성장하고, 그 와중에 집 나갔던 일찐도 정신차리고 돌아오고, 팀워크도 발전하고, 경기를 치르면서 점점 경험치를 쌓는 과정이 통으로 생략되었다.

게다가………..

누구나 다 아는 ‘산왕전’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송태섭’의 시점으로 전개한다.

주인공이 바뀐 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인 송태섭

이건 굉장히 대담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무척 성공적인 각색이었다.

일단 송태섭 자체가 (비중과 성격에 있어) 이야기의 주체이면서도 다른 팀원들을 보는 관찰자의 시점에 적합한 인물이어서, 극장판이 송태섭의 과거를 중심적으로 풀어나가면서도 가끔씩 다른 팀원들에게 비중이 돌아가는 게 어색하지 않다.

원작대로 강백호의 시점이라면, 산왕전 이전까지 쌓아온 서사가 너무 많은데다 본인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균형을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서태웅을 관찰자로 할 순 없잖아…

그리고 송태섭은 원작에서 주전 다섯 명 중에는 가장 개성이 옅은 편이다. ‘키가 작지만 당찬 성격과 스피드를 지닌 포인트 가드’라는 좋은 컨셉이 있긴 하지만 같은 팀에 자뻑 빨간 머리, 초특급 마이페이스 천재, 돌아온 일찐, 고릴라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슬램덩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원작을 접해보지 않은 관객도 송태섭을 통해 무리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한편 아는 이야기를 새로운 시점으로 바꿨기 때문에 이미 원작을 아는 사람에게도 신선한 충격의 연속.

30대가 아니라도, <슬램덩크>를 안 봤어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올만 한데…

일단은 가능하다.

영화의 짜임새 자체는 매우 탄탄하기 때문. (여담인데 정말 <슬램덩크>를 안 봤다면 차라리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는 걸 추천)

정대만과 서태웅

다만 앞서 말했듯이 송태섭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과거 묘사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강백호가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 계기나 리바운드에 집중한 훈련, 정대만의 일탈과 복귀, 서태웅의 개인주의와 강백호와의 라이벌리 등은 어렴풋하게 묘사될 뿐이다.

심지어 농구의 포지션이나 규칙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용 대사도 없다. 모른다고 해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인 것은 아니지만, 세세한 것들은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하시길.

하지만 <슬램덩크>를 안 보고 자란 세대 따위 내가 알 바야?

어린 송태섭이 형과 농구 연습을 하는 장면

박동과 적막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제 자신이 <슬램덩크>의 팬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좋아해서 좋은 게’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감탄이 터져 나온 부분. 특히 사운드 연출 쪽.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경기 도중 뚝뚝 끊기면서 회상이 들어가는데, 보통 이런 방식은 몰입감을 떨어뜨리고 지루해지기 쉽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고 한껏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뚝 끊어지고, 또 한 번 가라앉은 감정을 단번에 다시 끌어올리기란 어렵기 때문.

그러나 이 약점을 커버하는 것은 출중한 사운드 효과다.

긴장이 필요할 땐 박동 소리를, 
집중이 필요할 때는 적막을.

스포츠물에 있어서 사운드 효과는 정말 중요합니다. 소리가 템포를 만들기 때문.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사운드를 쓰는 방식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한창 달아오르던 경기 중에 모든 소리가 뚝 끊어지고, 단번에 드라마 모드로 돌입한다. 관객은 갑작스러운 전환에 얼떨떨하면서도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에 몸을 맡기며 등장 인물을 탐구하는데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원작 내용을 알고 있으면 무슨 회상이 펼쳐질지 알지만, 시점의 변화와 사건의 재정리는 여전히 흥미진진.)

또 캐릭터의 성격이나 심리를 직접적인 대사가 아닌 간접적인 언급, 표정과 몸짓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화면은 코트로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소리’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쿵, 쾅, 쿵, 하고 묵직한 농구공이 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심장의 리듬을 조절한다. 드리블 소리는 곧 드럼 소리가 되고, 비트는 점점 빨라지면서 잠시 식었던 몸이 단번에 열기로 끓어오르게 된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숨을 죽이게 만드는 템포 조절에 정신이 없음…

이 외에도 코트 위에서 바람 부는 소리가 난다든지 드리블 소리를 드럼으로 대체하는 장면, 클라이맥스에서 아예 음소거 모드로 들어가 극한의 긴장감을 주는 연출 등 세세한 사운드 연출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것만으로도 3회 차는 가볍다…

기술, 기법 그리고 기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기존의 애니판은 물론, 일반적인 TV 애니메이션과는 꽤 다르다. 시대의 흐름은 둘째치고 그림체나 색감 등이 확 다르다. 특히 채도가 매우 낮고(쨍하다기보단 좀 물빠진 느낌) 명암 구분이 희미해서 채색이 밍밍한 느낌.

90년대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90년대 애니메이션판의 작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채색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채색이 옅어지고 원작자의 작화를 거의 그대로 살려냈다

또 3D CG를 섞어썼고 모션 캡처를 활용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애니에 3D CG 블렌딩이나 로토스코핑 기법을 겁나 싫어해서 처음에 극장판이 공개되었을 때에도 뜨듯 미지근했다. 뭐랄까.. ‘애니 보는 맛이 없잖아’란 느낌. 

영화 초반만 하더라도, 동작이 부드럽고 현실적이긴 한데 역시 내 취향은 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본과 작화 등 모든 부분에서 철저하게 감수한 원작자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간 방향이고, 보다 보니 왜 그랬는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다. (참고로 캡쳐 이미지로 보는 것보다 영상이 훨씬 생생하기는 함)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드리블 움짤

간결한 채색은 원작자의 강렬한 선화를 매우 뚜렷하게 살려주며, 농구라는 스포츠 특유의 ‘압박감’을 굉장히 잘 살려냈다. 3D CG를 활용한 경기 장면은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또 연출이 절제되고 세련된 편이라 표정이나 숨을 길게 내쉬거나 흠칫거리는 등 작은 동작이 중요해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션 캡쳐기술도 정답이었던 듯.

하여간 보다보니 점점 익숙해진 것은 물론이고,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그림을 움직이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들지 않았다.

특히 현실적인 작화를 활용한, 시선의 방향이나 약간의 표정 변화만으로 감정과 상황을 설명하는 섬세한 연출이 압권. 

서태웅 눈빛

예를 들어 서태웅이 천재성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슈퍼울트라샤이닝레이져슛이 아니라 이다. 물론 중간중간 에이스라고 부르는 지나가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그가 ‘얼마나 천재인지’를 설명하는 (스포츠 만화에 일반적으로 많이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이나 설명조 대사는 없다.

하지만 조용히 상대를 쳐다보는 눈빛과 표정에서 그의 재능이나 숨겨진 성깔, 이전까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각성했다는 상태가 확 드러난다.

이런 묘사들이 대단히 현실적이라 오히려 “포기를 모르는 남자”나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같은 명대사가 좀 붕 뜬다고 느껴질 정도.

또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동작이나 개그씬이 많이 없어져서, 전반적인 텐션은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도 실사 영화에 가까운 느낌. (애초에 원작자의 작화 자체가 무척 사실주의적이기도 하고)

김전일과 강백호는 양보할 수 없지

라떼는 말이죠, 검열하느라고 애니에 나온 도쿄 타워는 다 남산 타워라고 부르고, 오사카는 부산이고 다들 한국인이었음…

요새 보면 좀 웃긴 정책이고(아직도 대놓고 기모노 같은 건 못 나오지만), 지금은 지역화 더빙을 따로 하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그렇게 하진 않지만… 그래도 김전일과 강백호만은 양보할 수 없는 이름이다.

이런 우리들을 위해 더빙판에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사용한다. 내로라하는 유명 성우들의 총집합에, 번역도 신경 쓴 티가 난다. 

오타쿠로서 우리나라 더빙 수준은 상당하다고 자부하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북산’이 아닌 쇼호쿠와 ‘강백호’가 아닌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너무 낯설어서 적어도 1회 차는 더빙판 이외의 선택지가 없음…

이것도 우리들에겐 <슬램덩크>가 단순히 그냥 재밌는 만화를 넘어, 어떤 시대적인 문맥과 함께 있다는 증거기도 하겠다.

슬램덩크 캐릭터 일러스트 포서트

종합평

농구에 대해 잘 모르고 <슬램덩크>를 난생처음 접하는 관객이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고, 수십 년간 덕질을 계속해온 <슬램덩크> 오타쿠라도 감동적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타깃은 학창 시절에 <슬램덩크>를 보고 좋아했으나 오랫동안 다시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다소 희미한 기억과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우물쭈물거리는, 어쩌면 과거는 과거라서 아름다울 뿐이고 나는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두려운 우리에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전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그때의 진심도 진심이 맞았고,
<슬램덩크>는 정말 좋아할 만했다고,
지금도 이렇게 멋있다고. 

댓글 남기기

Cabinet of Wonder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