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 공연은 처음인데요
연주회 당일, 공연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서도 나는 조금 우울해져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내 삶이 갑작스럽게 지난 며칠간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른 실수와 불안과 걱정과 상실이 내 안에서 휘몰아쳐, 사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한 걸음도 걷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티켓을 예매해 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갔다. 연주에 집중할 수 있을지, 안 그래도 클래식 공연은 처음인데 이 훌륭한 연주의 진가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미 내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불이 꺼졌다.
케이크를 자르는 칼
둥근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검은 옷을 입은 하델리히가 바이올린을 들고 나왔다. 바이올린은 참 작은 악기다. 그 짙은 오동색 몸체 위에서 활이 부드럽게 공간을 가르고, 나는 숨을 살짝 들이켰다. 악기 소리라는 게 실제로 들으면 녹음보다 대체로 부드럽기는 하지만, 이 바이올린은… 정말이지 뭐랄까…
생크림 케이크를 자르는 것 같다.
바이올린 특유의 선명한 소리는 그대로지만, 특유의 날카롭고 까다로운 느낌이 전혀 없다. 하루 종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서, 한순간도 질리지 않았다.
텔레만의 8번 환상곡으로 시작해 파가니니의 카프리스에 이르기까지, 1부는 내내 사근사근하고 경쾌했다. 클래식 음악이라기보단 재즈를 듣는 것 같은 블루스풍의 케이크워크는 낯설지만 즐거웠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이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케이크 먹는 것처럼’ 가벼운 태도라니.
그에 비해 관객은 뛰어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끊임없이 기침을 해대고, 코를 골고, 폰을 안 꺼놓고, 곡 중간에 박수를 치는 못난 관객들이었지만, 1부가 끝났을 때 스포트라이트의 가장자리에 비친 몇몇 얼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들을 보자 어둠 속에서 끓어왔던 악감정이 왜인지 스르르 풀려버리고 말았다.
샤콘느 속 하나의 음
인터미션 후 이어진 2부는 통째로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 통칭 ‘샤콘느’였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게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이때, 이 모든 순간순간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다.
나는 왜 샤콘느의 하나의 음이 아닐까.
인간은 왜 악기가 아닐까.
모두 녹아서 음정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그 소리를 듣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가득 채운다. 그리고 섬세한 손가락이 하나하나 짚는 음은 각각 분명하게 존재했다. 음악은 서로 앞뒤로 연결되는 길다란 선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수히 많은 점이었다. 그 순간마다 존재감이 있었다!
하델리히는 바이올린을 유난히 부드럽게 연주한다. 정밀한 연주와 산뜻한 감성이 그의 특기다. ‘애도의 음악’이라는 샤콘느도 그리 슬프고 장엄하지만은 않고, 한음 한음 짚어 나가는 신중함에서 현대적인 배려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지나친 감정에 휘몰아치지 않은 채 선명하게 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바흐의 샤콘느에는 그 유명한 구간이 있다. 심장 위를 켜는 것처럼 슬픈 소리가 나는,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4마디가.
나는 거의 그 부분만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이 아닌 나머지는 기억도 못 하고, 의미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화성과 화성을 연결하는, 마디와 마디를 연결하는, 음과 음을 연결하는 그 사이를 깨달았다. ‘멜로디가 좋다’거나 ‘슬프다’, ‘기분이 좋다’는 감상과는 전혀 다른 인식이 나를 찾아왔다. 음악은 수많은 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음 하나하나에 물리적인 존재감이 있다는.
어둠 속에서 숨도 잊고 듣고 있자니 그것들은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흔적처럼 느껴졌고, 나는 발자국을 따라 걷듯이 하나하나 다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노력했다.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목적지가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수한 몰입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는 샤콘느의 음이 아니니까. 나의 마음은 감동으로 벅차올랐다가, 살짝 졸음이 왔다가, 누군가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확 기분이 상했다가 리본처럼 움직이는 활의 궤적에 넋을 놓았다가 했다. 심지어 어둠 속에서 나를 며칠간 괴롭혔던 그 우울한 생각들도 몇 번이나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를 붙들지는 못했다. 그들은 음표 하나의 찰나조차 머물지 못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들을 지나쳤다. 혹은 그들이 나를 스쳤다. 내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여음, 안도
앵콜마저 끝나고 조명이 켜졌을 때, 나는 여전히 인간인 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두 손으로 박수를 칠 수 있어서 기뻤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멜로디에 벅차오른다든가, 가사에 감정 이입한다든가 하면서 음악을 들었다. 나에게 음악은 형식이 다른 소설처럼, 일종의 서사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해소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거대한 뭔가를 보았을 때, 그러니까 엄청나게 커다란 산이나 바다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떤 영속성을 마주하고 나서 고개를 돌리면, 자잘한 현실과 일상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며칠 동안 나는 불행과 우울이 영원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은 그런 데에 없다. 콘서트홀을 나온 순간 이미 내가 고통에서 상당히 많이 벗어나 있음을 느꼈다. 2시간도 안 되어 그 일은 먼지처럼 작아졌다. 지금도 가끔 얼핏 보이긴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가 이 연주회에서 위로를 받았다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음악은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쓰다듬과 토닥임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필요조차 없게 만들었다. 위로나 위안 대신, 남은 것은 길고 긴 안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