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리뷰
….이 영화 아무리 생각해도 홍보문구도 광고도 장르 분류도 다 잘못됐어.
목차

줄거리
유망한 신참 경찰인 조현수(임시완)는 악명 높은 마약 조직을 잡기 위해 교도소에 위장 잠입한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조직의 간부인 한재호(설경구)의 눈에 띄어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마약반 팀장인 천인숙(전혜진)은 현수가 교도소에 잠입하는 대신 그의 어머니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입원 전날 그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현수는 절망에 빠지지만 재호는 교도소 안의 연줄을 이용해 현수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외출 허가를 받아준다. 재호는 늘 배신당하고 속아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현수는 점차 재호를 믿고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3년 형을 마치고 나온 현수는 재호의 조직에 들어가 함께 일하게 되는데…

의리 없는 느와르
전도 유명한 신참 경찰이 범죄 조직에 위장 잠입을 하면서 조금씩 닳아가고, 서로를 속고 속이는 비정한 뒷세계의 모습은 잘 짜인 범죄물의 교과서와 같습니다. 전반적인 얼개나 캐릭터가 크게 새롭지는 않지만 적절한 유머, 연속적 반전, 활기 넘치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영화를 꼼꼼하게 장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뭐랄까…. 예쁘다?
그냥 비주얼적으로 예쁘장하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임시완은 그렇습니다), 영화 자체가 능숙하고 꼼꼼한 솜씨로 다듬어져 있다는 느낌.

꽤 흔하게 흘러갈 수 있는 장면들도 미장센이나 유머를 더해 포인트를 주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흉내낸 식당 장면이라든가, 창문이나 문의 프레임을 이용한 구도 등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어요.
은은하게 또라이같은 개그 코드와 재기발랄한 카메라의 움직임도 볼거리.
주변 인물들도 근본적으로는 뻔한 감이 없지 않지만 크고 작은 임팩트를 넣어서 누구 하나 묻히지 않습니다. 특히 마약반의 천 팀장은 비슷한 배역들 중에서 강렬하기로는 손 꼽히는 여캐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면 확실히, 의리 없는 뒷세계를 다룬 아주 많은 비슷한 영화들 중 약간 잘하는 녀석 정도로 남았을 텐데요.

키스 없는 로맨스
이 전반적인 무난성을 탈피하게 만드는 것은 현수와 재호의 관계.
현수는 자신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의지가 되어준 재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배신으로 가득한 그의 삶을 동정하고 공감하면서 그를 진심으로 신뢰합니다.
한편 비정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재호는 현수에게 유독 호의를 한가득 베풀며 그를 보호해주죠.
그러나 둘 사이를, 특히 현수에 대한 재호의 감정을 단순한 동질감이나 유대 관계라고 보려면 오히려 상당히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를 보는 눈빛부터 범상치 않은 건 애써 모른척 하더라도, 현수를 훔쳐본 변태(로 몰려 억울한 민철)를 다짜고짜 후드려패거나 그냥 둘이서 떠나자는 대사처럼 미묘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현수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나 현수를 보는 재호의 눈빛과 감정을 따라가는 연출 자체가 그냥 로맨스의 그것.
기본적으로 언제 키스를 갈겨도 이상하지 않을 텐션이라 약간 쫄면서 봄….
……물론, 작중에서 암시의 수준을 넘어선 직간접적 표현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호가 장난스럽게 “자기”라고 부르고, 병갑이 정분났냐고 핀잔주는 장면이 가볍게 지나가면서 묘하게 논란(?)을 정면돌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또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남기는지라 꽤 복잡미묘합니다.
작중에서는 결코 이름 붙여지지 않는 이 감정은 윤곽으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재호는 20년을 모신 보스가 자기한테 칼 꽂을 생각이라는 걸 들어도 이미 예상하고 있어 시큰둥한데, 현수가 뭔가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이성을 잃습니다.
그리고 현수가 다칠까봐, 자길 배신할까봐, 자신이 한 짓을 알게 될까 봐 끊임없이 걱정하죠. 그리고 결국 현수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 그렇게 살아왔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고 맙니다. 뭐에 씌인 것처럼.
합리적인 이성과 의심, 한 인간이 그간 쌓아온 삶의 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
……그거, 역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기: 소용돌이와 메아리
임시완 연기 잘 하는 줄은 알았지만 진짜. 와. 와…………
솔직히 언더커버 뛰기에 너무 고운 얼굴 아닌가 싶은데도, 그냥 그 모든 행동이 굉장히 설득력 있습니다. 초반부의 반듯하고 착한 신참 경찰이면서도 교도소 안에서 배짱있는 모습, 중반 이후에 완전 양아치 다 되었는데도 묘하게 순진함이 남아있는 모습이 전혀 다른듯 서로 이어지는 부분이 진짜 좋았어요.

보다보면 아주 그냥 조현수라는 애한테 확 꽂힐 수밖에 없습니다.
재치있게 꼼수를 부리며 씩 웃을 때는 너무 귀엽고, 어머니를 두고 위장 잠입을 해야하는 상황에 괴로워하고 잔인한 고문을 지켜보며 안절부절할 때는 안쓰럽고, 뒷세계에 물들어서 점점 날티가 날 때는 뿌듯하기도 하고 좀 씁쓸하기도 하고…
그리고 북받치는 감정을 다 쏟아놓을 땐 보는 사람 가슴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놓습니다.

설경구의 연기력은 뭐 말해 무엇이고.
사실 평상시 재호의 장난기 넘치는 가벼운 말투와 방정맞은 웃음소리는 좀 오바스러운데, 그 오바 자체가 한재호의 캐릭터성이라 ‘일부러 웃기게 구는데 속을 알 수 없어서 더 찝찝한 아저씨’가 완성됩니다.
그래서 재호가 정색하거나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을 때 그 작은 감정의 떨림조차 크게 느껴집니다.
임시완의 연기가 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소용돌이같다면, 설경구의 연기는 속삭이는 감정들이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느낌.

<불한당> 엔딩
※ 여기서부터 엔딩 내용 스포일러 주의!
.
.
.
현수는 자신을 장기말로 이용하는 천 팀장에게 환멸을 느끼고, 재호에게 자신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이중 스파이가 되어 그와 함께하기로 한다.
그러나 사실 재호는 교도소에서 이미 현수가 잠입 경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수를 회유하기 위해 부하를 시켜 어머니를 죽이고 그가 괴로워할 때 일부러 접근한 것. 하지만 정작 현수가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모습에 크게 흔들린다.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 현수는 재호와 함께 일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현수는 재호를 믿고 따르고 재호 역시 현수를 아끼지만, 그는 현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한편 조직은 러시아 마피아와 대규모 마약 거래를 하기로 한다. 현수에게서 정보를 입수한 인숙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동원해 항구에 모인 조직을 포위한다. 그러나 하지만 압수한 상자 안에 마약은 없고 성인용 장난감만 가득. 고 회장과 재호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인숙을 비웃으며 유유히 빠져나간다.
물건을 회수한 재호는 축하연 자리에서 고 회장을 죽여버리고 조직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편 인숙은 현수가 재호와 내통해 가짜 정보를 주었다는 걸 확신한다. 그녀는 현수에게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것이 재호라는 진실을 알려준다. 애초에 인숙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수가 감정 때문에 일을 망칠까 봐 숨기고 있었던 것.
충격을 받은 현수는 재호가 말했던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결국 인숙과 협력해 재호를 함정으로 불러들이는 전화를 건다.
재호는 갑자기 만나자는 현수의 전화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수를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는 친구 병갑까지 살해한 후 그를 만나러 간다.
현수는 재호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이것이 경찰의 함정이라는 것까지 모두 털어놓고, 재호가 뒤따라온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여 모두 살해하는 것을 그저 방관한다. 그리고 재호에게 지금 자신을 죽이라고 하지만, 재호는 현수에게 총을 쏘지 못하고 나온다.
인숙은 현장을 떠나려던 재호를 차로 치어버린다. 뒤이어 건물에서 나온 현수는 재호의 차에 실어둔 마약을 확인하는 인숙을 쏴 죽이고 죽어가는 재호에게 다가온다. 재호는 마지막으로 “나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말하고, 현수는 그를 목졸라 죽인다.
그리고 재호의 빈 차 안에 혼자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린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믿고 싶다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배신합니다.
정말 남김없이.
모두가.
모두를.
재호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고 천 팀장은 “당하는 게 나쁜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현수에게 진심으로 신뢰를 받고 있지만 그걸 되돌려주지 않습니다(못합니다). 재호는 현수의 몸을 뒤지고, 천 팀장은 아예 함정을 파서 그가 여전히 경찰 편인지 아닌지 시험까지 하죠. 진짜 환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마지막 순간 재호를 파멸시킨 건 믿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도 진짜 믿은 건 아니지만.
현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의 표정이나, 그러지 말라고 이거 아니라고 울부짖는 병갑에게 “내가 진짜 뭐에 씌였나 보다”라고 말하는 대사를 보면 그가 정말 믿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수를 만나러 왔죠.
믿고 싶으니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믿고는 싶으니까.
그러나 애초에 현수와의 관계 자체가 그가 만든 거짓 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관계는 절대로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재호 본인이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
“그런 일이 없었으면 네가 내 옆에 없었겠지.”란 말은 상당히 자조적으로 들리죠.
하지만 정말 믿음이 불가능할 때, 현수에게 찾아간 재호는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냥 물건 다 팔고 너랑 같이 떠나면 안되겠냐는 그의 가냘픈 본심은 (인과응보로) 현수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합니다. 이 지점에서 둘의 관계가 반전됩니다. 아니, 뭐랄까. 계승된다고 해야 하나?
“나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재호의 유언은 의미심장합니다. 나처럼 결국 누굴 믿어서 파멸하지 말라, 는 뜻일 수도 있고 반대로 나처럼 거짓과 배신으로 비참하게 살아가지 말라, 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그렇게 쨍한 대낮의 햇빛 아래 오픈카에 즐거운 표정으로 누워있던 재호의 모습으로 시작한 <불한당>은 푸른 새벽의 희미한 빛 아래 오픈카에 누워 멍하니 눈물을 흘리는 현수의 얼굴로 끝납니다.

종합평
<불한당>은 내용을 단번에 요약해 버리면 꽤 단순한 이야기가 됩니다. 언더커버 범죄 장르나 심지어 BL 코드적인 면에서도 독창성보다는 기본기가 더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장면을 굉장히 공들여서 섬세하게 만든 영화예요. 연기, 대사, 연출, 음악 등 어느 방면에서든. 임시완의 빛나는 연기는 진짜 볼거리. 이렇게 하나하나 공들인 기교를 보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다만 영화의 섬세한 감성을 읽고 푹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소 뻔하게 느끼거나 혹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느와르물의 텐션이나 익숙한 조폭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리와는 결이 많이 달라서.
엔딩이 정말 카카오 99%의 초콜릿 같습니다. 아주, 아주 조금 달았는데 금방 파도같은 쓴 맛에 뒤덮여서… 녹진한 다크초코의 향이 계속 머물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불한당>
사랑한다는 말 없이 완성되는 사랑, 불신으로 완결되는 믿음의 비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