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Film

전,란 (2024) 리뷰 :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는 둘의 세계

전란 강동원 포스터


전란 강동원 노비

전, 란 줄거리

양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빚 때문에 어머니가 노비가 되었다는 이유로 지체높은 양반가의 도련님인 종려(박정민) 대신 매를 맞는 노비가 된 천영(강동원).

종려와 천영은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함께 무술을 겨루는 친구가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던 천영의 바람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차승원)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자 종려는 왕을 모시러 집을 떠나지만 그 사이에 집안의 노비들이 들고 일어나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그는 천영이 자신을 배신하고 식솔들을 죽였다고 오해해 그를 증오하게 된다.

한편, 불타는 집에서 겨우 도망친 천영은 의병에 합류하여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청의검신’으로 불리게 된다. 그는 종려의 옷과 검을 쓰면서 여전히 친구를 그리워하지만 전란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둘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지는데…

전란 전쟁 액션

전, 쟁, 반, 란

전쟁의 잔혹함, 끔찍한 계급 차별에 대한 비판, 민중적 영웅 서사, 여기에 두 남자의 우정과 파국이 섞여있는데 뭘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음…

전반적으로 꽤 힘있게 만들어진 영화는 맞지만, 뭐라고 할까… 그 모든 게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는 묘한 찝찝함이 남는다.

일단 영화의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매우 직접적인 사회비판 의식. 사람을 양반과 천민으로 나누는 가혹한 신분 차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며, 그것을 뿌리째 뒤엎을 준비를 하는 영화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 민중의 슈퍼히어로 탄생 서사라고 과언이 아니며 제목이 <청의검신의 등장~업라이징~>이어도 납득 가능할 정도.

여기에 양반과 노비의 신분을 뛰어넘은 찐한 우정이 버무려지는데, 이 관계성이 강렬한 드라마를 더해주는 것은 맞지만 전체적으로 천영의 서브 서사에 그친다.

영화의 주제 의식이 이야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명작들 중 하나는 <아가씨>가 있다. <아가씨>는 페미니즘과 계급 비판 사상이 두 여성의 러브스토리와 완벽하게 섞여서 전혀 갈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 란>의 경우 시대 배경과 신분 차별은 철저하게 천영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일 뿐이고, 천영과 종려의 관계는 천민과 양반이 함께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예시에 그친다.

말하자면 ‘이야기’보다 ‘사상’쪽이 더 강하고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주제 속에 이야기가 잘 섞여들어 부드러운 감칠맛을 낸다기보단 완전하게 섞이지 않음…

그래서 꽤 재미있게 보았고 나름 흥미진진했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걸 느꼈는지 깔끔하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이 든다.

전란 박정민 강동원

한쪽이 다한 브로맨스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가 된 종려와 천영의 관계는 애절하게 그려지고, 마케팅도 이쪽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대놓고 브로맨스를 기대하고 보았다면 그 관계성이나 감정 교류는 충분히 세밀하지 못하다.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천영의 영웅적 서사와 계급 철폐 주장에 집중하고 있고, 종려와의 관계는 천영을 장식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사실 영화의 브로맨스는 박정민의 절절한 연기가 거의 다 했는데, 마케팅팀이 이를 실컷 이용해 광고해놓고 영화 본편에서는 좀 거리를 두는 수작을 부린다.

박정민의 눈빛이 ‘그냥 노비랑 친구하는’ 수준이 아니라, ‘천영이라는 인물 자체에 끌리는’ 정도로 깊게 들어가서 그의 감정과 광기가 더욱 강렬해지는 효과가 났을 뿐 이건 영화가 의도한 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

과거 장면도 천영이 불합리하게 당하는 고통과 그의 자유를 향한 의지에 집중할 뿐, 솔직히 말해서 종려와 천영이 왜 그렇게 서로에게 애절한지는 조금 의문이 든다.

특히 천영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종려 쪽이 훨씬 진심임…

천영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분노에 미쳐버린 종려의 심리는 쫌쫌따리 계속 나오는데, 천영 쪽은 아주 단편적으로밖에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천영도 집에 불이 나자마자 도련님부터 찾고, 종려의 옷을 입고 다니는 등 꽤 순정이긴 하지만 서로에 대한 감정의 무게나 비중은 종려가 훨씬 크고 강한 편.

종려는 천영 때문에 괴로워하고 변화하지만 천영은 그다지 종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천영은 날 때부터 자유로웠고, 원래부터 졸라짱쎘으며, 성장하는 구석 없이 이미 완성된 인물입니다.

설정에 비해 그 설정을 살리는 법이 좀 두고두고 아쉬운….

전란 차승원

어기면 죽는 법칙

영화는 장대한 주제 의식을 말하기 위해 대비를 매우매우 많이 활용하는데, 영화 속 모든 장면, 모든 대사가 하나하나 대비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왜군을 죽이는 천영 vs. 백성들을 죽이는 종려
  • 천영의 파란 옷 vs. 종려의 붉은 옷 (그리고 겐신도 붉은 갑주)
  • 주먹밥 줘 vs. 물 왜 안줘
  • 선조의 경복궁 육천칸 발언 vs. 김자령 장군에게 한 칸짜리 집을 지어주겠다는 범동
  • 굶주리는 백성들이 줄지어선 담벼락 안쪽에서 놀자판 벌이는 양반들
  • ‘천영’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생각하는 종려와 자령 장군의 차이

적당한 대비는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전,란>은 거의 모든 것이 빠짐없이 대비를 이루고 있어 약간 재미가 없어진다.

심지어 매우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작중 양반같은 양반은 단 한 명뿐이고 지겹도록 반복되는 개쓰레기 나쁜놈 vs. 핍박받는 불쌍하고 착한 우리편 구도는 뒤로 가면 갈수록 더해진다. 계급 철폐가 중요한 건 알겠는데 거기다 밑줄을 긋고, 긋고, 긋고, 그어서 구멍이 뚫려버린다.

그래서 대규모의 자본과 멋들어진 연출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가 어쩐지 프로파간다가 풍기는 묘한 촌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뒷맛을 남긴다.

전란 진선규 김자령

삼각관계의 프랙탈

위에 이어서, 이 영화는 기본적인 구조가 프랙탈마냥 끊임없이 반복된다. 작은 관계는 큰 관계의 축소판이고 큰 관계는 작은 관계의 확장판이다.

먼저, 천영과 종려의 관계는 천민과 양반의 관계로 확장된다.

종려는 신분과 상관없이 천영을 아끼지만 부모나 부인 앞에선 슬쩍 논의를 피해가거나 방조하는 데 그친다. 종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사도를 천영에게 안기고 그가 무사히 도망치기를 비는 것 뿐.

(하지만 그의 ‘최선’은 천영이 번번이 다시 추노꾼에게 잡혀왔듯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는 김자령 장군과 범동을 비롯한 의병이 헤어지는 장면으로 확대된다. 김자령 장군은 종려보다도 훨씬 열린 마음과 곧은 심성의 소유자인데도 계급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왕이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그의 순진한 이상과 기존의 질서에 들어가 순응하면서 살자는 온건주의는 결과적으로 독이 되었다.

종려와 자령 장군은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뭇 양반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래도 그들은 양반이고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아무리 해도 양반과 천민은 같이 살 수가 없다”고 울부짖는 범동의 말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꿰뚫는 한 마디.

그리고 한동안 확장된 채 펼쳐졌던 의병과 관군과 전쟁의 삼각관계는 영화 후반부, 천영과 종려와 겐신으로 다시 응축된다.

  • 존엄성을 위해 스스로 들고 일어난 의병들= 천영
  •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관군(양반)= 종려
  • 그 모든 이들을 잔인하게 핍박하는 외세= 겐신

이야기의 스케일은 해무가 가득 낀 해변에서 다시 개인적인 사이즈로 줄어든다.

종려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오해지만) 천영을 증오하지만, 천영이 종려에게 분노하게 된 것은 의병과 관군이라는 관계에서 오는 공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천영은 종려의 행동이 사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무장해제된다. 종려는 누명을 씌워서 의병을 핍박한 관군이 아니라 자신이 배신했다고 생각해 상처받은 친구다.

….그리고 종려가 결국 ‘친구’로서 천영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것은, 그 자신의 인과응보이자 천영에게 있어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이 죽었고, 그를 이해해줬을지도 모르는 양반도 이제 한명도 없으니까)

전란 일본인 장수 킷카와 겐신

한편, 킷카와 겐신은 보통 사극에 등장하는 일본인이 흔히들 그러는 것처럼 멍청하고 평면적인 악당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꽤 재미있는 인물이다. 잔혹하고 비열한데 별로 짜치진 않는다는 점이 꽤나 신선하달까.

천영은 겐신과 싸울 때 매우 신나 보이는데 이는 겐신이 천영을 대등한 무사로서 인정하기 때문. 아이러니하게도 겐신 앞에서 천영이 가장 자유롭게, 타고난 실력을 뽐내며 행동할 수 있다. 좀 더 상징적으로 보면 천영은 ‘전쟁’ 덕분에 자유로워진 것.

다만 겐신의 대등하다는 개념은 매우 일그러져 있어서, 남의 나라 쳐들어와서 코 베어가놓고 무사 대접을 바라는 장면을 통해 애초에 ‘무사도’라는 것이 (선조의 ‘권위’만큼이나) 헛된 관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전란 액션

액션: 멋있는데 멋있는 척하기

넷플릭스 오리지널답게 대규모 자본에 힘입어, 영화 내내 매우 힘있고 강렬한 연출이 펼쳐진다. 수위도 높은 데다 액션 신이 정말 많고 상당히 화려하다.

몇번이나 맞서는 겐신과 천영의 대결은 매번 재미있고, 불타는 경복궁이나 짙은 해무 속에서 벌어지는 삼파전은 미장센에 매우 공을 들였다.

여기에 전투씬에 무려 일렉과 사물놀이를 깔거나 노래의 형식을 빌어 배경을 설명하는 등 소리를 활용한 대범한 시도도 눈에 띈다.

그런데.

솔직히 ‘와’하고 감탄이 나오는 장면이 적지 않은데도 “멋있는 영화”라고 부르기엔 좀… 뭐랄까, 너무 힘을 주고 멋있는 척을 해서 순순히 멋있다고 인정해주기 띠꺼운 그런 마음이 듭니다.

액션이 풍성하기는 하지만 칼날이 스윽 강동원의 얼굴을 비껴가는 슬로우모션 연출의 반복이나 게임에 어울릴 것 같은 과장된 몇몇 동작들도 가끔 흥을 식게 만든다.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배경에 비해서 천영은 너무 먼치킨이고 그의 액션은 게임스럽다. 진삼국무쌍에 가까운 그것….

정말 맛있는 음식은 마지막 한 입이 아쉬운 법이고, 진짜 멋진 액션은 감질나서 더 보고 싶은 건데 <전, 란>에는 그 한끗의 미학이 없음….

전란 강동원 짤

종합평: ★★★

솔직히 말하면, 믿고 안 보는 배우가 몇 명 있는데 데 강동원이 그 중 하나다. 퐁당퐁당이 너무 심함… 아니, <검은 사제들>은 너무 좋았는데 그 다음 작품들이 눈을 찌르고 싶었고 전체적인 타율이 2할이 안되는데 믿음이 없는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이번엔 안보지 않기를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배역보다 ‘강동원’이 더 크다는 고질적인 문제점은 여전하긴 해도 나름대로 어울리는 캐릭터였고, 영화 자체도 보는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요란하게 판을 벌이고 힘있게 휘두른 것치고 영화가 좀 헛발질을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심각한 주제, 멋들어진 미장센, 잔혹한 연출과 힘있는 연기 등 너무 꽉 채우려 하다보니 오히려 그 욕심이 묘한 답답함으로 변해버렸다.

무엇이든, ‘한끗’은 남겨놔야 하는 법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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