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와는 정반대로 2편이 성공하는 일이 많습니다.
바이오하자드 2, 언차티드 2, 매스 이펙트 2, 어쌔신 크리드 2, 레드 데드 리뎀션 2 등 명작 2편들이 즐비하고, 특정 프랜차이즈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건 2편에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법칙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또 하나의 명작이 탄생했으니, 바로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입니다.
전작인 <호라이즌 제로 던>은 활과 창을 가지고 기계 공룡과 싸운다는 비범한 세계관과 탄탄한 시스템으로 단숨에 플레이스테이션의 대표 독점작으로 자리매김한 수작입니다. <제로 던>이 심혈을 기울여 처음 소개한 세계관을, <포비든 웨스트>는 더욱 깊고 넓게 펼쳐 보입니다.
스토리: 1의 끝은 2의 시작

2편의 시작은 1편의 엔딩 거의 직후로, 뉴비들이 ‘포비든 웨스트’부터 시작하기에는 스토리의 장벽이 상당히 높은 편. 게다가 전작 유저라도 (현실 세계에서) 5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기억이 좀 가물가물합니다.
물론 작중에서 계속 설명해주긴 합니다. 하지만 세계관 자체가 상당히 크고 복잡한데다 전작에서 알아낸 모든 진실을 기본 지식으로 깔고 들어가기 때문에 소화하기 버겁습니다.
적어도 전작을 해보거나, 요약본을 미리 보고 가는 것을 추천.
~뉴비를 위한 초 간단 요약본~
군용 로봇들이 통제 불가능해져서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인류를 벙커에 피난시킨 후 언젠가 다시 지상으로 나올 때 도움이 될 다방면의 AI 기술을 모은 것이 ‘제로 던’ 프로젝트.
제로 던 덕분에 인류는 수백 년 후까지 살아남지만, 일부 AI가 파손되어 과거와 단절된 채 원시적인 부족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중 제로 던의 하부 모듈 AI인 하데스가 폭주를 일으키는 바람에 다시 한번 세계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제로 던 총괄 AI인 가이아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프로젝트의 창설자인 엘리자베스 소벡의 유전자를 복제해 어린아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바로 주인공인 에일로이.
에일로이는 출생이 불분명한 탓에 불길한 아이로 취급받고 갓난아기때부터 부족에서 쫓겨나 추방자로서의 삶을 살지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하데스를 막아내 세계를 지켜낸다.
………. 여기까지가 전작인 <호라이즌 제로 던>의 이야기입니다.
온 지구 생명체를 위협한 하데스를 물리친 것도 잠시, 이번엔 과도한 테라포밍으로 인한 ‘붉은 역병’이라는 새로운 재앙이 닥친다. 에일로이는 쉴 틈도 없이 다시 한번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나서는데….
이것이 2편의 시작.
기존 유저들의 기억을 되살리랴 뉴비들한테 설명해주랴 새로운 땅으로 가는 개연성을 구축하랴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초반부가 살짝 지루한 것이 흠.
하지만 한번 테낙스의 영토-‘포비든 웨스트’로 발을 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됩니다.
그래픽: 아름다움과 거대함과 섬세함
<호라이즌 제로 던: 포비든 웨스트>는 PS5를 제대로 활용한 첫 작품입니다. 거대한 스케일, 아름답고 독특한 스타일, 섬세한 디테일을 두루 갖추고 매 순간마다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저번에도 맵은 제법 넓었지만 이번에는 진짜 진짜 넓어요. 대충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남쪽으로는 라스베이거스에 닿습니다.
맵이 질리도록 넓지만 질리지 않는 이유는 다양한 지형과 각각의 지역적 특색을 잘 살렸기 때문. 다양한 지형이 모두 아름답고 각각 또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황무지를 넘었더니 갑자기 늪지대가 펼쳐지다가 탁 트인 푸른 해안이 드러날 때는 거의 감동적이기까지 하죠.
선명한 색감과 풍성한 자연 표현, 그리고 원시적인 자연과 기계의 묘한 조합은 정말 독보적입니다. 울창한 밀림에서 덩굴을 헤치고 갑자기 어두운 SF풍 옛 유적으로 한발 내딛을 때의 그 대조, 호라이즌 시리즈를 대체할 수 있는 게임은 단 하나도 없어요.

아래로는 물에 잠긴 도시를 탐사할 정도로 깊이 잠수할 수 있고, 위로는 비행 기계를 타고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보통은 수중이나 비행 파트는 각각 DLC 하나로 추가될 만큼의 볼륨인데 몽땅 본편에 때려 박아서 그 다음에 뭐가 나올지 생각이 안 날 정도입니다.
오픈월드 게임이 넓기’만’ 하면, 비슷비슷한 풍경과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금방 흥미를 잃게 되죠. 하지만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는 스케일과 밀도를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탐험할수록 놀라움이 계속 이어진다는 건 오픈월드로서 정말 대단한 점이에요.
인물 그래픽 역시 매우 자연스럽고, 특히 각 부족의 문화를 반영한 아트 디자인을 눈여겨 볼 만합니다. 호전적이고 힘을 중시하는 테낙스와 채식과 평화주의로 상징되는 우타루 등 새로 등장한 부족들은 기존의 여러 작품에 나왔던 원시 부족 클리셰를 따르는 듯 하지만,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심도 깊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얄팍한 느낌은 결코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상의 역사와 문화를 꽉꽉 채워놓은 건 리즈 시절 매스 이펙트를 연상케 할 정도.
인물보다는 세계를
<호라이즌 제로 던: 포비든 웨스트>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세계 그 자체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호라이즌 시리즈는 주인공인 에일로이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깊은 탐구보다는 세계를 탐사하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반대로 인물 개개인에 대한 서사나 매력은 아쉽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호라이즌 시리즈는 에일로이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이건 전형적인, 너무나 전형적이라 오히려 매우 희귀한 영웅신화죠.
그러나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점 외에 에일로이 개인의 서사가 그리 흥미롭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에일로이는 복잡한 세계관을 탐사할 아바타로서는 잘 기능하지만 그 이상으로 플레이어가 애착을 가질 만한 구석을 찾기는 힘듭니다.
(그나마 1편에서는 에일로이의 출생의 비밀과 힘든 삶이 나름의 드라마이긴 했는데.)

2편은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넓어졌다는 느낌이지 깊어졌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기본 플롯이나 에일로이를 비롯한 인물들의 행동은 여전히 평면적입니다. 착한 사람은 착하고, 나쁜 사람은 나쁘고, 사일렌스는 사일렌스.
특히 에일로이는 2편 들어 명실공히 ‘세계의 구원자’로 활약하는데, 맡은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하지만 그녀 개인의 정체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임무 수행에 너무 최적화되어 있어서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생생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세계의 관리자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에일로이가 지닌 서사가 약한 건 아닌데, 개인<세계라서 감정적인 이입이 충분히 되지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에일로이가 의식을 잃으며 로스트를 찾는 등 소소한 부분은 있지만 ‘일단 세계를 구하는데 집중하자, 개인 일은 나중에’ 라는 느낌.
물론 심플한 이야기와 평면적인 캐릭터가 가지는 장점도 있어요. 세계관이 복잡한데 플롯마저 복잡하면 한 번에 잘 들어오지가 않죠. 위쳐처럼. 그러나 위쳐는 애초에 원작이 있고 다른 미디어 믹스로 확장하면서 이를 커버했습니다.
포비든 웨스트는 인물의 서사에 이입하고 감동을 느끼는 것보다 세계를 구석구석 탐사하고 비밀을 밝혀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이 일을 방해할 수 있는 곁가지를 모조리 쳐낸 느낌입니다.
일단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그치만…!
전투: 뭐가 이렇게 많아?

하지만 스토리 측면과는 달리 전투 시스템은 전작보다 더욱 깊고 다채롭게 발전했습니다.
호라이즌 시리즈의 시스템은 대략 <몬스터 헌터>+<배트맨 아캄>+<어쌔신 크리드>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포커스를 활용해서 적의 위치와 움직임, 약점 등을 파악하고 각종 지형지물과 상성을 이용해 사냥하는 것이 기본.
사람 적도 꽤 많이 나오지만 핵심은 역시 기계 사냥. 필드에서 거대한 기계를 맞닥뜨렸을 때의 긴장감과 함께 짜릿함은 남다릅니다.
기계를 상대할 때는 해당 기계의 특징과 약점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계별로 약점 부위와 속성이 달라 하나를 상대할 때에도 상당히 전략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기계에서 떼어낸 부품들은 몬헌처럼 따로 갈무리를 해 재료로 쓸 수 있고, 기계가 가진 무기를 쏴서 분리시키면 중화기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장갑판이 떨어질수록 기계 자체의 방어력도 내려가니 거대 기계를 상대할 땐 한방에 뭘 어쩌겠다는 생각 대신 조각조각 내기가 먼저.

근접무기는 창으로 고정이고, 장비할 수 있는 무기의 종류는 총 9가지. 슬롯이 6개로 늘어났는데 높은 등급의 무기를 장비하면 화살 종류도 2~3가지씩이라 휠이 엄청나게 복작복작해집니다.
게다가 기계의 약점과 부위 파괴를 노리고, 무기별 스킬과 ‘솟구치는 용기’까지 합치면 진짜 정신이 없음…
무기 휠을 열거나 스킬을 사용하면 슬로 모션이 걸리기 때문에 밀리초 단위의 반사신경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전기 블래스트 슬링을 사용하고 산성 화살로 등 껍질을 터뜨려야지’ 정도는 넣고 있어야 스무스한 사냥이 가능. 기본적으로 가장 손에 잘 붙는 무기 몇 가지는 슬롯에 고정시켜두는 것을 권합니다. 기본 무기 타입인 사냥꾼 활이 매우 좋기 때문에, 사냥꾼 활은 상비!!

설정에서 난이도를 조정하면 무뇌 플레이로도 그럭저럭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워지지만, 빡빡하고 치열한 사냥은 이 게임의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적당히 피지컬을 요구하면서도 성장 시스템으로 지원하는 밸런스가 절묘하거든요.
피지컬이나 센스에 자신이 없어도 기본적으로 RPG라서 스킬을 찍고 좋은 무기를 얻어 부지런히 강화시키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니 도전해 보시길.
탐험: 자유라는 이름의 환각
오픈월드는 가끔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오해를 받곤 합니다. 사실 그보다는 ‘넓은 맵에 여러 가지 할 일을 엄청 많이 뿌려놓은 게임’이라는 게 더 정확합니다. 물론 완전 직선형 게임에 비해서 잠깐 옆길로 빠져서 서브 퀘스트를 하거나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등 운신의 폭이 넓은 건 사실이지만, 어땠든 ‘자유’라는 이름은 꽤나 오해의 소지가 많죠.
특히 어드벤처 요소가 강해지면 퀘스트의 진행 방식도 상당히 직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젤다는 예외지만)

호라이즌 시리즈는 ‘꼭 이 길로 가서’ ‘이 발판을 밟고’ ‘이 장치를 작동시켜라’라는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즉, 답은 정해져 있고 그걸 때려 맞추는 게 주요 플레이 과정이에요.
가마솥이나 유물이 있는 폐허의 퍼즐은 거의 그 옛날 정통 어드벤처 게임을 연상케 할 정도.
어드벤처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로서 퍼즐의 비중이 큰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동할 때에도 이런 루트가 정해져 있어서 자유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 포커스가 파쿠르로 갈 수 있는 곳을 표시해주지만 역으로 포커스로 표시되지 않는 곳은 (아무리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판정이 은근 칼 같음….
이게 문제인 이유는 충분히 직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분명 수그리면 기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힘을 주면 열릴 것 같은데 안됩니다. 다른 작품과 비교를 해보자면 <언차티드> 같은 경우 못 가는 곳은 진짜로 못 갈 것처럼 보이고 <어쌔신 크리드>는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그냥 다 기어 올라갈 수 있어서 문제가 안되거든요. 포비든 웨스트의 문제는 바로 이 사이에 있습니다.
워낙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래픽을 지닌 게임이다 보니 작위적인 퍼즐이 가지는 위화감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종합평

뭐, 사실, 사소한 트집을 잡으려면 많이 늘어놓을 수 있지만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는 그런 행동이 약간 졸렬해 보일 정도로 매우 훌륭한 게임입니다. 엄청난 독창성과 밀도로 이렇게 넓은 세계를 가득 채우다니, 좀처럼 없는 대작이에요.
5년 전, 이름 없는 혜성처럼 깜짝 등장했던 호라이즌 시리즈는 2편에 들어 1편이 우연이나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게임계의 법칙에 따르면, 탄탄한 게임성을 갖추고 독자적인 포지션을 굳히는 데 성공한 2편은 앞으로 시리즈가 쭉쭉 이어집니다.
그러니 혜성처럼, 곧 다시 다음 편으로 돌아오겠죠? 더욱 큰 놀라움을 가지고.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순수한 놀라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