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 XVI
- 개발: 스퀘어에닉스
- 플랫폼: PS5, XSX, PC
- 장르: 액션, 판타지, ARPG
- 출시: 2023년 6월 22일
파판13부터 실망에 실망에 실망에 실망을 거듭해 와서 급기야 이젠 나오든가 말든가 신경도 안쓰고 있었는데…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파판이 16편에 이르러 불사조처럼 부활했다.
보이려고 하는 것만큼 잔혹하고 어른스럽진 않지만, JRPG의 성장이 느껴진다.
인생은 30대부터,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운명 분기점.
★★★☆

목차
줄거리
마더 크리스털의 마법으로 번영했던 발리스테아 대륙. 그러나 이제 그 풍요로움은 다해가고 전쟁이 끊이질 않는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각국에는 강대한 소환수를 부릴 수 있는 도미넌트라는 존재가 있어, 전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로즈필드 대공 가문의 장남인 클라이브 로즈필드는 본인은 소환수를 부릴 수 없지만, 소환수 피닉스를 품고 있는 도미넌트인 어린 동생 조슈아를 지키기 위해 그의 나이트로서 실력을 갈고 닦는다.
그러나 전쟁을 앞두고 출정 의식을 준비하던 어느날 밤 대공 일행은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조슈아가 피닉스로 현현해 폭주하기 시작하자, 또 다른 불의 도미넌트가 나타나 클라이브의 눈 앞에서 피닉스를 죽여버리고 만다.
대공이 사망하고 소환수도 사라진 로자리아 공국은 그대로 황국에 종속되고, 클라이브는 이름도 잃은채 노예인 베어러 병사 신세로 13년을 보낸다.
살아있는 목적은 단 한가지. 동생을 죽인 원수, 불의 도미넌트를 찾는 것.

스토리: 겉은 왕겜 속은 일겜
전쟁과 인권 유린이 당연시되는 어두운 세계관과 잔혹한 묘사, 캐릭터를 가차없이 죽이는 전개 등은 명백하게 <왕좌의 게임>을 흉내내고 있다.
초반부터 어린아이인 조슈아가 아버지의 피를 뒤집어쓰고 멘붕하거나 이프리트가 피닉스를 찢어버리는 장면 등 수위가 상당히 세다.
또 초반부터 전쟁을 둘러싼 복잡한 정세와 다양한 인물들의 교차, 곳곳의 소소한 반전 등이 꽤 재미있다. 기존의 파판과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빛깔.

하지만 겉껍질은 상당히 왕겜스럽게 만들긴 했어도 내용물은 일겜 그대로다. 정말 묵직한 현실감을 주기엔 작위적인 전개와 일겜 특유의 유치한 대사가 발목을 잡는다.
특히 대부분의 상황 설명과 심리 묘사를 유치한 대사로 때우는 일겜 특유의 버릇이 하나도 안 빠져서 종종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구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클라이브가 13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고 절규하는 장면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처절한데, 그 다음에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겠어!”라는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직접 말하니 위화감이 쩐다.
까말 왕겜의 존 스노우가 똑같은 대사를 친다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지 생각해 보라고…

캐릭터들(특히 악역)의 깊이가 부족한 것과 작위적인 설정도 단점.
악역들은 황당할 정도로 얄팍하며, 13년 전에 생이별한 소꿉친구가 인질로 잡혀가더니 내가 암살 임무를 맡은 적국의 인간병기가 되었고, 헤어진 반려견을 주워다 키워준 사람이 전쟁통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설정 같은 건 운명적이라기보단 어이가 없다.
그 외에도 규모를 키운 것치고 정치 싸움은 초딩도 알 만큼 단순한 레벨이고 모든 마더 크리스털에 몰래 접근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거나 하는 어설픈 개연성은 애써 넘어가줘야 하는 부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인 스토리 자체가 꽤 흥미롭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클라이브의 복수가 해결된 후(근데 이게 상당히 초반)에 그는 다소 무매력으로 변해버리고, 소소하게 지적하고 싶은 디테일은 산더미같은데, 그럼에도 ‘이 다음에 어떻게 될까?’하는 이야기의 추동력이 상당하다.
후반부터 엔딩까지는 JRPG스러운 “인간”, “마음”, “세카이”, “마모루” “신지루”의 대잔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을 본 후에는 강하고 진한 여운이 남는다.
캐릭터의 노림수보다 오히려 메인 스토리의 뚝심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최근의 파판과는 궤를 달리하고, 매우 칭찬하고 싶은 부분.

전투: 파이널 데메크
적든많든 정적인 RPG 요소를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던 시리즈의 전통과는 달리 파판16은 완전한 실시간 액션 기반.
조작하는 것은 클라이브 한 명뿐이지만, 근접 공격과 마법, 소환수 스킬을 조합하는 콤보를 통해 화려한 액션을 펼칠 수 있다. 또 (요새 유행답게) 회피와 패링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가장 비슷한 게임은…….음, <데빌 메이 크라이>?
처음에는 피닉스뿐이지만, 다른 소환수 능력을 흡수하면서 점점 사용할 수 있는 소환수 스킬이 늘어난다. 소환수는 한번에 3개까지 장착할 수 있고 각각의 스킬은 3개씩. (변경할 수 없는 스킬 1개와 변경 가능한 2개)
소환수에 따라 플레이스타일이 달라지고, 같은 소환수 안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스킬을 조합할 수 있어 액션이 상당히 다채롭다. 소환수를 다 모으는 것은 후반부지만 조금씩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
다만 파판은 다크소울같은 하드한 액션겜 못하는 낡은이와 쟈포네스크 오타쿠들이 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난이도 자체는 낮은 편. 아주 친절하긴 하지만 게임이 ‘너무’ 쉽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적들의 다양성이 많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공격이 점점 단조로워진다는 게 아쉬운 점.

이번 작품에서 크게 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환수.
소환수를 품고 있는 도미넌트 단 한 명만으로도 전황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는 설정인데, 작중 나오는 소환수전의 연출은 정말 그 강력함을 제대로 보여준다.

보스전은 다양한 컨셉으로 진행되면서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강력하고 거대한 힘’이라는 설정을 매우 잘 살렸다. 기가 질릴 정도로….
스크립트 범벅에 시네마틱 연출이 조금 난잡한 구석도 있지만, 뭐… 이런 게 없었으면 또 보는 재미는 줄었겠지.

게임 시스템: 양산형 판타지
요새 대작 게임치고 드물게 오픈월드가 아니다. 월드맵을 통해서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는 있는데 에리어맵 자체가 그리 크지도 않고 거의 대체로 직선 진행.
최근의 다른 게임이랑 비교하자면…어… <스타레일>? 근데 맵 자체는 스타레일이 더 재밌음..
이 자체로는 단점이 아니지만, 텅텅 빈 맨땅같은 맵의 밀도는 아쉽다. 맵에 탐색 요소가 전무한데다 (보물상자는 있지만 보상이 끌리는 수준은 아님) 별 개성이 없다.
다른 게임과 비교해보면, <플래그 테일: 레퀴엠>은 완벽한 일자형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밀도높은 구성과 충격적인 비주얼로 탐사의 즐거움이 있었고, <엘든 링>은 밀도가 좀 널널한 편이긴 했지만 그 스산함이 세기말이라는 분위기를 잘 살린데다 몹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커서 밸런스가 맞았다. 반면 파판16의 필드는 양산형 판타지 지역을 대충 이어놓은 수준에 그친다.
성의없는 사이드 퀘스트와 합쳐져서 필드를 돌아다니는 게 너무 귀찮고 노잼….

레벨 디자인과 반복적인 퀘스트 설계만큼은 정말 봐줄 수가 없다. 최근 몇년간 본 게임들 중에 거의 손꼽히게 못 만들었음…
던전은 문 열고- 몬스터방-전투-문열고-몬스터방-전투의 연속. 하늘의 유적 정말 지겨워 죽는줄…
사이드 퀘스트 역시 “이거 가져와” “저거 물리쳐줘”의 반복이며, 내용상으로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동선이 그지같은 건 보너스고.
최근 게임들은 사이드 퀘스트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게임 속 세계로 몰입하는 기반으로 삼는데 이런 지점에서는 시대를 역행한다. “약초 3개를 가져와줘.”라는 낡아빠진 퀘스트라인 한 십년만에 보는 듯…
그 외에 동선도 소소하게 불편하고, 뭐랄까 기본적인 설계 자체가 조금 옛것이라는 느낌.

청소년 관람 불가의 유치함
파판치고 이례적으로 18금을 받았는데 이렇게 된 거 아예 잔뜩 활용하기로 했는지 연출적으로는 청불감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어른스럽냐면 그건 아니야.
잔인하게 죽어있는 시체들을 보여주는 카메라 연출은 너무 인위적이고 후져서 ‘두-둥!!! 어때!!! 잔인하지!!!! 우리 청불이야!!!!!‘를 외치는 듯 하다. 딱히 별로 쓸모도 없는 섹드립이나 무의미하게 나오는 누드신은 픽 웃음이 나올 정도.
그리고 누드도 꼴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민망하고 추접스러움…
결국 강렬한 수위에 충격을 받고 섬뜩해진다기보단 욕을 처음 배운 초딩이 신나서 여기저기 어색하게 욕을 쓰는 걸 보는 듯한 약간의 공감성 수치를 느끼게 된다.
클라이브는 (게임이 크게 터닝포인트를 도는 초중반에) 33세다. JRPG 주인공이 30대인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고, 작중의 어두운 분위기는 그의 행동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배경이다.
하지만 정작 클라이브의 생각과 행동은 기존에 있었던 수많은JRPG의 왕도적 주인공 애송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행동은 좀 조숙한 18살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작가진이 굉장히 다크하고 무게감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깜냥은 없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둡고 잔인한 세계지만 우리 편은 착해야 하고, 진짜 중요한 동료는 죽거나 잔인하게 유린당하면 안되고, 악당들은 뭔가 좀 사정이 있어보이는 사이코이며, 주인공의 행적은 모두 아름답고 영광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지 못했다.
험난한 세상에서 힘과 몸을 팔면서 살아온 베네딕타는 대놓고 눈요깃거리로 삼으면서 질의 처녀는 유지시키려고 애쓰는 제작진의 하남자 오타쿠스러운 마인드도 소소하게 좀 웃겼다.
세계관의 묘사 면에선 까놓고 말해 라이트노벨만 보던 고등학생이 <왕좌의 게임>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서 처음으로 쓴 소설같은 느낌.
뭐, 이건 일반적인 일본 감성 자체의 문제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파판으로선 어——–엄청 많이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질이 (고질적 성녀캐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지만) 악당을 푹찍하는 과단성을 지녔고, 디옹의 연인이 남자라든가 하는 부분.

종합: Finally, Fantasy
어째 쓰다보니 이런저런 불평불만이 많아진 것 같은데, 사실은 40시간 동안 꽤, 많이 즐거웠다. 자잘하게 태클 걸고 싶은 점은 정말 수십수백 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액션 게임으로서의 좋은 모습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부분에서 합격점. 가끔씩 소소한 디테일이 부족해도 전반적으로 계속 플레이하고 싶게 만드는 강한 힘이 있다.
파판에서 오랜만에 보는 (SF풍 요소가 안 섞인) 중세 판타지 분위기라는 점도 반갑고, 캐릭터 메이킹 면에서도 고루한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게 보인다.
그리고 “와, 파판이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와 “와, 파판이 이랬었지”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밸런스.

무엇보다 이제 드디어파판이 갈라파고스적 한계를 인식하고 벗어나려고 하는구나, 라는 점이 느껴졌다. 일본 게임 특유의 고착적인 틀에 머물러있던 JRPG라는 장르가, 그리고 그 대표격인 파판이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가상하다.
잔혹하고 다크한 세계관과 JRPG 특유의 이상주의적 스토리가 완벽하게 결합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파판16은 주인공과 세계의 관계라는 거대한 메인 스토리를 중시한다.
오타쿠를 노린 캐릭터 설정과 서로 간의 얄팍한 관계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많은 JRPG(최근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포함)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굉장히… 한 단계 성장한 느낌.
<파이널 판타지 XVI>가 앞으로의 파판의 운명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서야, 혹은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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