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탐정 코난 극장판 20기 순흑의 악몽
- 개봉: 2016년 8월 3일
국민 만화에 입덕하는 게 가능할 줄이야.
종합평 : ★★☆
코난 극장판의 전환점
<명탐정 코난>은 지난 20년 동안 국민 만화, 어린이용 탐정물, ”약 먹고 몸은 작아졌지만 진실은 언제나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 편한 작품, 모두들 보지만 덕후는 많이 안 붙는 애니…..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재 20년 만에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처음으로 여성 오덕층을 어마어마하게 끌어들여 코미케를 장악하는 전환점을 맞았고, 극장판 매출이며 화제 범위가 크게 늘었다. 그 시작이 바로 아무로 토오루의 등장이었고, 빵 터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순흑의 악몽>.
까놓고 말해 이번 극장판이 코난의 앞날을 바꿔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명탐정 코난>을 마지막으로 본 게 한 15년쯤 전인 주제에 ‘나도 코난 좀 봤다’는 사람이 요새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그게 뭔데? 얘가 누군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는 거.
미안해, 머글들아. 이제 코난은 너희를 위한 게 아니야.
순흑의 악몽 줄거리
어느 날 밤, 검은 조직의 멤버 ‘큐라소’가 경시청에 숨어들어 전 세계 각국의 NOC 리스트를 노린다.
공안 경찰인 후루야 레이와 FBI 요원인 아카이 슈이치가 그녀를 추격하지만, 그녀가 몰던 차가 다리 위에서 추락하고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한편 새로 개장한 토토 수족관에 놀러 간 코난과 소년 탐정단은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기억을 잃어버린 한 여성을 발견한다. 소년 탐정단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겠다면서 여성과 함께 놀이공원을 누비지만, 그녀에게서 수상쩍은 점을 감지한 코난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순흑에 더해진 큐라소의 색
<순흑의 악몽>은 솔직히 다 폭망해도 후술할 아카이와 아무로의 임팩트 때문에 적잖게 회자되었을 작품이지만, 의외로 인상깊은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다.
음, ‘추리물’로선 아니지만…

그 중심에는 큐라소라는 캐릭터가 있다.
큐라소는 검은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상당한 능력과 포스를 내뿜다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아이들과 교감을 쌓아가는 모습이 합쳐져서 무척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오드아이를 비롯해서 색채에 대한 설정도 상당히 섬세하고, 심리를 표현하는 방식도 세련되었다.
보통 코난에서는(특히 극장판) 범인이나 등장인물이 막판에 울고불고 하면서 말이 안 되는 동기를 자기 입으로 얘기하는데, 큐라소는 그런 장면이 없다.
하지만 소년 탐정단과의 교류가 찬찬히 그려져서, 관객들은 큐라소가 왜 조직을 배신하게 되는지 아무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고 이는 훨씬 감동적으로 와닿는다.

작품 전반에 깔린 짙은 서정성은 역대급으로 처절한 연출과 맞물려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이번 엔딩은 3기 이후로 가장 임팩트 있었던 엔딩이라고 생각…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에 ‘추리’는 없다. 이번 작품에 ‘범인’은 존재하지 않고, 굳이 장르명을 붙인다면 첩보 액션물…?
관객은 처음부터 큐라소가 검은 조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중에서도 주요 인물 모두가 큐라소가 누군지 알고 있고. 그래서 코난은 이번엔 진실을 추리하는 탐정이 아니라 비장의 한 수를 내놓는 조커의 역할을 맡는다.

사실상의 더블 센터
아카이 슈이치와 아무로 토오루는 초반 등장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클라이맥스를 완벽하게 접수한다. 사실상 이번작 센터는 이 둘.
아직까지 이게 원작자가 노린 건지 아닌 건지 정말 모르겠고 신기함… 솔직히 이 아저씨가 일부러 치밀하게 노렸을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냈지…원판이 샤아랑 아무로 레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메이저 될 운명이었나????

아무로는 이번 극장판이 극장판 첫 등장인데, 관객들에게 검은 조직에 잠입한 공안 경찰이라는 간단한 소개만 하더니 아카이에 대한 감정과 관계에 바로 초점을 맞춘다. 원작을 안 봐서 아무로에 대해 모른다면 ‘얘는 왜 저렇게 쟤를 쫓아다니나’ 싶을 정도.
하지만 원작의 복잡한 관계는 애니화가 되면서 한층 흥미진진해졌다.
참고로 자막/더빙에 따라서 느낌이 묘하게 달라지는 것이 포인트.
더빙판에선 안기준(아무로)이 연상인 이상윤(아카이)을 상대로 아예 반말이라 성깔 있고 바락바락 대드는 건방진 연하라는 느낌이 드는 한편, 자막판에선 빈정거리는 느낌이 강한 반존대.
한편 아카이도 더빙판은 좀 더 샤프한 느낌인 반면 자막판은 연륜이 두드러진다. 자막판에선 아카이가 아무로를 ‘키미(대체로 연하의 상대를 부드럽게 부르는 2인칭)‘라고 부르는 거 듣고 설렘과 킹받음을 동시에 느낌….

일단 그런 섬세한 관계성을 파악하지 못했어도, 이 둘의 액션은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현실적이고 박력있는 전투신은 이번작이 상당히 호평받는 부분. 물론 그 배경이 관람차 위라는 건 안현실이지만…
발차기로 기둥을 부수고 총알을 피하는 정신 나간 가라테 연출과는 달리 절권도와 복싱의 폼이나 특징을 잘 살린 것이 인상적.
작정하고 패는 아무로와 달리 아카이는 묘하게 봐주는 듯한 태도에, 아무로가 난간에서 떨어질 뻔하자 반사적으로 붙잡아주는 등 둘 사이의 복잡한 사정이 액션을 흥미롭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코난의 개입으로 (아무로가 일방적으로) 으르렁대면서도 둘이 결국 협력하게 되는 건 꽤 재밌는 부분.
코난은 둘이 왜 싸우는지 전혀 모르지만 둘 다 코난에게는 일단 접고 들어가기 때문에 주인공 보정의 쾌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서로 다른 특기로 협력해나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탈색당하는 검은 조직
한편 검은 조직은 갈수록 포스를 잃어간다. 큐라소가 유능한 모습을 보여줘서 다시금 검은 조직의 가오를 살려주나 했더니, 사람이 오가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변장도 없이 버젓이 앉아있는 베르무트며 분조장에 가까운 진의 행보로 파시식….

그 외에는 저지르는 일의 스케일에 비해 행동이 너무 가벼워서 ‘철저하다’ ‘무섭다’기보단 ‘뭐지 이놈들은?? 제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몰입을 방해한다. 이 조직이 어떻게 저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보다는 이 조직이 대체 어떻게 이 능지와 인내심을 가지고 여태까지 안 망했던 건지 의문이 생긴다.
…검은 조직은 그냥 배경 깔아주는 병풍이었고 실제로 중요한 건 큐라소의 서사와 아카이-아무로 콤비였다는 걸 생각하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던 건가 싶지만.
조직 이야기인 만큼 키르나 하이바라도 나름 소소한 비중을 챙겼다. 키르는 고생만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이바라가 ‘지켜지는 쪽’임과 동시에 아이들을 ‘지키는 쪽’이기도 한 점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종합평: 국민 만화의 새로운 색깔
한동안 정말 수준 이하의 어린이용 영화만을 쏟아냈던 흐름에서 <순흑의 악몽>은 상당히 다른 색깔을 띈다.
<순흑의 악몽>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코난은 이젠 예전의 코난이 아니라는 거. <명탐정 코난>은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중적인 국민 만화 타이틀을 달고는 있지만,누구나 아무 때나 다시 볼 수 있는 라이트함은 줄어들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관계성으로 오타쿠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대폭 늘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덕후 기질이 없는 사람에겐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네.
….근데 덕후면 좀 재밌을 듯.
과장된 액션이 상당히 호쾌하고 잘 뽑혀서 보는 재미는 있는데다, 메인 내러티브는 좀 특기할 만한 구석이 있었고…. 특정 캐릭터들에 호감이 있다면(적어도 거부감이 없다면) 더없이 좋은 극장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