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일 블루 아이 (2022)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는 기껏해야 희미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영화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

줄거리
전직 뉴욕 형사지만 딸이 실종된 후 술에 취해 은둔하고 있던 랜더(크리스천 베일).
그에게 육군 사관학교에서 사건을 의뢰한다. 육군 사관학교 생도 한 명이 자살하고, 누군가 그 심장을 도려낸 것.
랜더는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생도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다. 그는 독특한 상상력과 추리력을 가진 한 생도(헨리 멜링)를 눈여겨 보고, 그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기로 하는데….
그 젊은 생도의 이름은
E.A.포.
에드거 앨런 포.

토요 명화 극장
<페일 블루 아이>의 고풍스러운 화면과 사운드, 그리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전개까지도 매우 예스럽다. 어렸을 적에 좋아했던 ‘토요 명화 극장’같은 느낌.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서릿발이 날리고 안개가 자욱한 풍경과 화려하지만 꿉꿉한 분위기를 풍기는 화면, 상실감과 우울함에 빠진 수사관과 잔혹한 살인 사건. 일단은 클래식한 소재에, 요새는 보기 드물게 매우 정통 시대물스러운 분위기. 여기에 크리스천 베일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그래서 조금 느린 듯한 전개에도 뭔가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보게 되지만…
솔직히 말하면 범인을 찾는 과정도 재미가 없고 범인의 동기도 재미가 없으며 반전도 엔딩도 재미가 없다.
진짜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고루하고 진부한지.
게다가 랜더와 포의 유대감이나 감정선 등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후반부의 급전개가 당황스러움… 뭐 예상 가능한 전개였기 때문에 좀 어이가 없고 여전히 집중이 안될 뿐 놀랍지는 않다.
영화를 보느니 책을 읽자
에드거 앨런 포는 살아생전 그리 조명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고 미스터리어스하게 죽었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흉내 냈고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그의 영향 속에서 태어났는지, 그 많은 유산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어둡고 음울한 거대한 성을 그가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페일 블루 아이> 역시 그 성을 이루는 작은 벽돌 중에 하나로, 젊은 시절의 에드거 앨런 포를 직접 극에 참여시키며 나름의 리스펙을 표한다.

포 역을 맡은 헨리 멜링(해리 포터의 더들리라고?!?!??!!)의 독특한 마스크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마와 눈썹뼈가 튀어나와 눈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에서 빛나는 초롱초롱하고 총기가 넘치는 옅은 푸른색 눈. 약간 찌그려져 있으면서(ㅋㅋㅋ) 조금 우울한 인상임에도 선량하고 순수한 인물을 그대로 살려낸다.
또 작품을 구석구석 세세하게 보면 불치병에 걸린 아름다운 여인이라든지 묘하게 광기가 맴도는 저택, 망자를 보고 듣는 환영과 환청 등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세계에 대한 오마쥬와 리스펙 등이 많다. (중간에 포가 낭송하는 시는 실제 그의 시는 아니라 허구지만)
‘창백한 푸른 눈‘이라는 영화 제목은 실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제목은 아니지만, 그가 1843년에 쓴 단편 소설 <고자질하는 심장>에 짧게 언급된다. 작중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나오는 대목은 아닌데 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영화랑 관련이 있…을…지도?

… 하지만 에드거 앨런 포를 기리고 싶다면 그냥 그의 책을 읽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추리물로써 구성이 썩 좋지 않다. 모든 단서가 갑작스럽고 편리할 때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랜더가 죽은 생도의 일기장을 해독하는 장면. 죽은 생도가 굳이 암호로 글을 적어놓은 이유도, 거기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나오지 않고 나중에 랜더가 필요한 부분만 “일기장에 그렇게 쓰여있었다”라고 밝히는 식이다. 전반적으로 사건 전개도 심심하고 루즈한데다, 랜더가 용의자를 지목하고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범인과 진실을 연관시켰을 때에도 그 개연성과 핍진성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 뭐, 이것도 사실 ‘상상력으로 연결한 추리’나 ‘탐정이 다 눈치챘는데 사건의 마지막에야 폭포수처럼 진상을 늘어놓는‘ 뒤팽에 대한 오마쥬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작품을 통틀어 강렬한 임팩트를 느낀 게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건 좀 실망스러운 부분. 비싼 돈을 들인 게 분명한 화면과 쟁쟁한 배우들의 실력치고는 너무나 희미한, 희미할 뿐인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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