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 리뷰 :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

FILM, REVIEW

탈주 리뷰 포스터

목차

탈주 이제훈 홍사빈

줄거리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부대의 중사 임규남(이제훈)은 10년 만기 제대를 앞두고,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조차 없는 북한을 벗어나 철책을 넘어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오랜 시간 철저하게 준비하지만 부하인 동혁(홍사빈)이 그의 계획을 알아채고 먼저 탈주를 시도한다. 동혁을 말리려던 규남은 얼결에 함께 탈주병으로 체포당한다.

한편 조사를 위해 부대에 찾아온 보위부 소좌 리현상(구교환)은 어렸을 때부터 알던 규남을 탈주병을 잡은 영웅으로 만들고 사단장 직속 보좌 자리까지 마련해준다.

그러나 규남이 이를 거부하고 끝내 탈주를 감행하자 현상도 그를 철저하게 추적하는데…

탈주 이제훈

운명으로부터의 탈주

주인공이 북한 군인이고 그가 탈북하려는 이야기지만, 규남이 도망치려고 하는 대상은 북한보다 크다. 그리고 더 강력하다.

규남이 탈주하려는 건 운명 그 자체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고, 실패도 해볼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래서 규남은 현상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자리를 제안(이라기보단 강제였지만)하는 것도 거부하고, 위험한 탈출에 목숨을 건다.

무려 탈북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가난한 북한의 사정을 적나라하게 비추거나 ‘생존 의지’를 강조하지 않는 게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이다. 규남의 목적과 의지는 생존을 넘어선 위치에 있기 때문. 꽤나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물리적인 장르인 액션 스릴러로 그려낸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

매슬로의 5단계 욕구론에 대입하자면, 규남의 의지는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볼 수 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생리적, 안전, 사회적, 존경의 욕구 등 4가지 욕구의 가장 위에 있다.

규남은 아문센 탐험기를 읽으며 탐험가의 꿈을 키워왔는데, 직업 선택 자체가 자아실현의 일부이지만 그중에서도 탐험가라는 직업은 매우 진취적이며 이상주의적이다. 북한에서는 (사회 체제의 성격상)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직업이기도 하다.

규남의 꿈과 가치관은 북한에서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건 현실적인 가난이나 계급 문제가 아니다. 그냥 안된다. 그래서 잘살게 해준다는 현상의 제안이 규남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규남은 반드시 북한을 탈출해야만 했다.

정해진 운명에 좌절을 느끼고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감정은 국적을 불문한 것이기 때문에, 규남의 이야기는 단순한 북한인의 탈주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북한 사람인 규남이 남한 노래인 <양화대교>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의지를 다지는 장면은 이 주제 아래에 남북한이 따로 없다는 걸 분명하게 드러낸다. (사실 배경만 북한이지 오히려 그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은 남한 청년의 이야기에 가까운 느낌도 든다.)

한편으로 추상적인 상위 욕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빠질 여지가 있고 후반부는 좀 그렇게 힘을 잃긴 했는데, 어쨌든 연료가 다 할 때까지 규남은 있는 힘껏 달린다. 그저 앞으로만.

탈주 이제훈

깔끔하게 사람 잡는 솜씨

영화는 군더더기가 없고, 솜씨가 좋다. 시작한 지 5분 만에 영화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강렬하게 드러난다. 주인공과 이야기의 목적, 연출력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는 멋진 오프닝이다.

탈주와 추적을 다루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템포와 긴장감인데, <탈주>에서는 “X됐다”를 외치게 하는 순간이 적절한 순간 자주 나온다. 재미있다는 뜻이다. 연출이 깔끔해서 규남이 통행증을 위조하거나 자동차를 찾는 장면 같은 건 스피디하게 후루룩 진행하면서 사소한 부분에서 들킬 뻔한 장면에 긴장감을 빡 몰아넣는다. 강조할 부분에 포인트를 찍으면서도 깔끔한 연출과 클리셰를 피하려고 노력한 것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들판에 ‘인민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라고 커다랗게 쓰여있는데, 규남이 탄 차가 ‘행복’이라는 글자를 뚫고 나가고 나중엔 사격으로 인해 다른 글자들이 무너진다. 남은 글자는자유를 위해’다.

하지만 이게 풀샷으로는 잡히지 않는다. …너무 뻔하니까. 이 풀샷으로 잡히지 않는 것까지가 미덕이야.

또 이야기 전개상 ‘도망치는 주인공과 멍청한 추적자’라는 클리셰도 거의 통하지 않는다. 북한군이 의외로 빠릿하고 눈치가 빨라서 단서를 잘 놓치지 않는다. 리현상은 유능하고. 특히 한 손에 무전기만 든 채 지도를 보고 병력을 지휘하는 모습은 꽤나 신선했음.. 군대가 체질 맞는 거 같은데

탈주 구교환

인물 탐구 영역

<탈주>의 가장 탄탄한 부분은 캐릭터로, 임규남과 리현상 두 인물은 무척 섬세하게 짜여있다. 인물 묘사가 이제훈과 구교환의 연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그걸 빼놓고 봐도 인물의 심리나 서사를 구질구질하게 풀지 않지 않는 연출이 좋았다.

예를 들어 규남과 현상의 관계는 바로 밝혀지지 않는다. 현상이 규남과 아는 척하지 않다가 둘만 있을 때 ‘규남아’라고 부르면서 활짝 웃는 장면에서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다음엔 현상의 언급으로 규남의 아버지가 현상의 아버지네 운전수였다는 사실이 추가로 더해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캐릭터의 미스터리가 단계별로 벗겨지기 때문에 따라가는 재미가 촘촘하다. 

특히 리현상이 진짜 흥미로운 인물이다. 군인이면서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신경 써서 바르고,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두드리며 등장할 때만 해도 꽤 뻔해 보이는 악역 간부인데, 그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꽤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무슨 배역이든 자기 걸로 만들어버리는 구교환 덕분도 있지만.

탈주 리뷰 후기 송강

그리고 리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은 송강이 맡은 선우민인데….

(스포일러 펼치기)

연회장에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묘한 분위기고, 선우민이 리현상에게 대뜸 피아노 연주를 요청하더니 정작 현상의 연주를 듣고 혼자 자리를 떠버리는 등 둘 사이에 뭐가 있어도 많이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리현상은 러시아에서 피아노 유학을 했고, 그때 선우민과 알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다만 여기서도 정확히 어떤 관계고 어떤 과거를 공유했는지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는다. 선우민의 “그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라고 하자마자 리현상이 전화를 끊어버리기 때문.

또 선우민의 번호가 러시아어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은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몰라도 영화의 이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탈주 러시아어 번역

현상이 선우민의 번호를 저장해놓았던 저장명의 뜻이 ‘내가 사랑했던 개자식’이라는 건, 알아두면 좋을 부분.

구교환은 인터뷰에서 선우민을 두고 “현상이 과거에 두고 온 꿈이나 유령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리현상에게 있어 선우민은 두고온 과거, 가질 수 없었던 미래, 정해진 운명 때문에 잃어버린 것.

그런데 사람이 제일 쪽팔리는 순간이 언제일까?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현상은 규남에게 “다들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냥 산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거의 당당하게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이 선우민을 보았을 때는 매우 불편해하는 티가 난다. 선우민은 (틀림없이 예전같지 않을) 그의 피아노 연주를 요청하면서 일부러 현상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현상을 흔들어 놓는다.

말하자면 현상은 탈북을 포기한 규남이다.

규남에게 내뱉은 “나라고 하고 싶었던 게 없는 줄 알아”라는 말은 확증.

이를 기반으로 영화를 다시보면, 현상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인다. 규남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고, 탈주를 말리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안 듣는 규남에게 화가 나고, 미칠듯이 짜증난다. 규남과 비슷하기 때문에 느끼는 공감과 그와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그래서 배우 구교환의 말대로, 현상은 규남을 쏠 수가 없다.

자신이 포기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규남을. 그 꿈을 어떻게 부수나.

탈주 리뷰 스틸

연료가 떨어진 후반부

영화는 지뢰가 파묻힌 울퉁불퉁한 길을 솜씨 있게 운전해 가며 거침없이 달리지만, 안타깝게도 막판에 연료가 다 떨어지고 만다.

스토리상으로 털털거리며 맛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을 거의 명확하게 짚을 수 있는데, 바로…. 그. 후반부에서 갑자기 신파가 나오기 시작하는 장면. 딱 거기부터.

그전에도 북한군이 스톰트루퍼마냥 수백 발을 쏘는데 한발 스칠까 말까 하는 작위적인 구석이 있긴 했지만 대충 넘어갈 정도이긴 했는데, 딱 그 장면부터는 아예 난감할 정도로 정상적인 진행이 아니다.

막판에 규남과 현상이 대치하는 것도, 순전히 주인공 둘이 멱살잡고 마주하는 신을 뽑기 위해 만들어진 작위성 끝판왕인 장면. 어떻게 현상이 유령처럼 혼자 들판에 나타났나, 어떻게 앞서가는 규남에게 들키지 않았나 같은 기본적인 의문을 풀어주려는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없다. 

다만 이 때쯤이면 영화의 퀄리티를 논하기 이전에 이제훈을 응원하는 마음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어찌저찌 넘어가게 되는 것.

엔딩 역시 마찬가지로, 그동안 신파와 감성팔이를 자제했던 전반부에 비해 뻔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압도적인 오프닝에 비하면 엔딩은 푸쉬식… 그냥 이것도 ‘이제훈이 행복했음 좋겠다’는 관객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의지하려는 나이브한 행동이다.

………그래도, 뭐.

그렇지.

행복하자.

탈주 이제훈 구교환 이미지

그저 앞으로 가는 수밖에

고르지 않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탈주>는 굉장히 깔끔하고 세련된 연출과 주제 의식을 향한 거침없는 뜀박질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액션 스릴러다. 보는 내내 콩닥콩닥한 긴장감이 일품.

디테일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절묘하게 상황과 이어지는 라디오 내용, 임규남의 과거와 심리가 <양화대교>에 덧입혀지는 장면도 그렇고 현상이 부하를 미친 듯이 팰 때 라흐마니노프 연주곡이 흘러나오는 등 음악을 뛰어나게 사용했으며, 배경음악과 사운드 효과도 꽤 좋다. 

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신이 몇 개 있는데.. 오프닝도 그렇고, 규남이 고문당할 때 전등이 깜박거리거나 어둠 속에서 총소리만 들리는 등 어둠을 활용한 장면… 아, 규남이 물에 뛰어들고 나서 현상이 들여다보는 듯한 장면 전환 등 소소하고도 확실하게 센스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전반부에 비해 뒷심이 부족한 것이 매우 아쉽다. 오프닝에 비해 엔딩이 많이 모자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입 안에서 굴려 가면서 오랫동안 뒷맛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영화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역시 <양화대교>를 듣자.

댓글 남기기

Cabinet of Wonder에서 더 알아보기

지금 구독하여 계속 읽고 전체 아카이브에 액세스하세요.

계속 읽기